나무를 몇 번이나 그려왔을까. 어림으로 가늠해도 백 번은 넘을 것이다. 그 숫자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나무 앞에 서면 처음처럼 막막해진다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다. 익숙해졌다고 말하기에는, 손은 언제나 더듬고 시선은 주저한다. 그려왔다는 기억과 지금 마주한 나무 사이에는 늘 얇은 간극이 있다. 그 간극 앞에서 나는 자주 멈춘다. 어쩌면 그 멈춤이 나무를 그리는 일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며칠째 나무 그림과 독대하듯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윤곽이 없었다. 나무라기보다는 덩어리에 가까운 무엇, 혹은 아직 이름 붙지 않은 형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났고, 그럴수록 질문은 또렷해졌다. 다른 작가들은 이 국면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이 애매함과 과잉, 혹은 결핍의 순간을 어떤 방식으로 자기만의 언어로 수렴시켰을까.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몇몇 작가들의 나무 그림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탐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천천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그들의 나무는 모두 달랐다. 어떤 나무는 거의 기호에 가까웠고, 어떤 나무는 풍경을 밀어내며 화면을 점유하고 있었다. 어떤 나무는 지나치게 침착했고, 또 다른 나무는 설명을 거부하듯 불안정했다. 그러나 그 차이보다 더 또렷하게 다가온 것은, 그들이 나무를 ‘무엇으로 보았는가’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대면했는가’였다. 나무는 그 태도의 결과처럼 화면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다시 내 그림을 돌아보았을 때, 뜻밖에도 나무는 이미 충분히 거기 있었다. 내가 그려온 그림들 속에는 나무가 빼곡했다. 다만 그것들은 언제나 다른 무엇과 함께 있었고, 어떤 장면의 일부였으며, 배경이거나 통로이거나 혹은 감정을 대신하는 장치였다. 나무들만으로 가득 찬 공간을 나는 아직 그려본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이 문제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생각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태도를 가다듬어야 하는 순간, 나는 신호등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 멈추고, 언제 건너야 하는지 알려주는 어떤 기준. 하지만 그 신호등은 늘 점멸등처럼 작동한다. 분명 신호는 들어오고 있는데, 그것이 파란 불인 지 노란 불인 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 태도의 섬세함 앞에서 나는 언제 파란 불이 들어오는지를 알지 못한 채 서성인다. 어쩌면 나무를 그린다는 것은, 바로 그 서성임을 견디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연말 모임에서 나눈 대화가 자꾸 떠오른다. “사람 생각 다 거기서 거긴가 봐요. 내가 그리고 싶은 소재, 여기에도 있네요.” “소재를 다른 이의 그림에서 만나고 절망하는 일도 이제는 별로 안 하게 되네요. 그냥 뭘 봐도, 그 묘함을 어떻게 볼 건가 가 더 중요해지나 봐요.” 그 말들은 대수롭지 않게 오갔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경쟁이나 비교라기보다는, 각자가 서 있는 자리의 차이를 조용히 인정하는 태도에 가까운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무를 많이 그린다. 그리고 자주 그린다. 그러나 많이 그리고 자주 그린다는 사실이 곧 익숙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매번 다른 나무를 만나고, 매번 다른 질문 앞에 선다. 나무는 늘 거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조금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매 순간 신호등을 확인하게 된다. 지금은 건너도 되는지, 아니면 잠시 더 머물러야 하는지.
아마도 나는 아직 나무를 ‘완성된 이미지’로 그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신 나무를 바라보는 나 자신의 태도를 계속해서 수정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 수정은 느리고, 때로는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맴돎 속에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무의 형태라기보다는, 나무 앞에 선 나의 호흡, 망설임, 그리고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각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무 앞에 선다. 파란 불을 확신하지 못한 채, 그러나 점멸하는 신호를 완전히 외면하지도 못한 채. 그 애매한 상태 그대로, 다시 붓을 든다. 나무는 아마도 그 상태를 가장 잘 견뎌주는 존재일 것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내가 도착할 때까지 서두르지 않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