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리다가 풀리지 않아 미뤄둔 그림이 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태어났지만 사라진 그림이 있고, 지난 전시를 무사히 통과해 살아남은 그림도 있다. 전시를 위해 태어났지만 끝내 벽에 걸려보지 못하고 포장된 채 창고로 들어간 그림이 있는가 하면, 여러 차례 덧칠과 수정을 견디며 힘겹게 남은 그림도 있다.
나는 그것들을 한데 모아 오래 바라본다. 한때는 나의 하루였고, 한 시기의 숨이었던 것들. 그러나 이제는 손을 놓아야 하는 화면들이다.
레드 바이올린이라는 영화에서 한 악기는 여러 사람의 삶을 통과한다. 불타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끝내 다른 손으로 옮겨 간다. 그림도 비슷하다. 다만 어떤 것은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멈춘다. 그 방 안에서 태어나, 그 방 안에서 사라진다. 오늘은 그런 그림들을 정리하는 날이었다. 장례식도 없이, 조용히.
그림이 죽으면 둥글게 말려 보관되거나 파기되고, 틀은 다시 사용된다. 주말이 지나면 분리된 틀들이 공장으로 보내질 것이다. 더 이상 수장고를 늘릴 수 없다는 현실은 생각보다 단단하다. 그 한계 앞에서 나는 보류 중이던 그림들의 생과사를 빠르게 결정한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무언가를 지배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안다. 나는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몇 해 전의 나는 끝까지 설득하려 했을 장면을, 지금의 나는 설득하지 않는다. 더 이상 나를 밀어내지 않는 색, 이미 자신의 의미를 다 말해버린 구도 앞에서 나는 조용히 물러선다. 그것은 잔인함이라기보다, 시간이 내린 선택에 가깝다.
사라진 그림들은 실패라기보다 흔적에 가깝다. 그 위에서 나는 몇 번이고 망설였고, 몇 번이고 멈추었다. 그 망설임이 이후의 붓질을 바꾸었을 것이다. 어떤 장면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지만, 그 미완의 긴장은 다른 화면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정리된 작업실은 묘하게 가벼워진다. 벽과 바닥 사이에 작은 공백이 생기고, 그 공백이 나를 마주 보게 한다. 무엇을 그릴지 묻는 대신, 지금의 내가 어떤 침묵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말을 줄인 화면과, 오래 머무는 장면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지.
틀은 다시 사용될 것이다. 이전의 그림이 사라진 자리 위에 새로운 장면이 올라간다. 보이지 않는 기억이 나뭇결 속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완전한 시작은 없다는 것을, 모든 시작은 어떤 끝 위에 놓인다는 것을.
여러 차례의 전시를 지나오며 나는 조금 달라졌다. 모두를 남길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또렷하게 만든다. 선택은 상처를 남기지만, 동시에 방향을 만든다.
이렇게 정리된 그림들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조심스레 시작을 생각한다. 사라진 것들이 남긴 것은 상실이 아니라 여백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빈 틀을 바라보며 나는 오래 서 있다.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표면 앞에서 숨을 고른다.
시작은 언제나 조용하다. 누군가의 박수도, 설명도 없이 스스로를 건너온다. 끝을 지나온 자리에서, 시작은 생각보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