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와 이상주의의 역설에서 배우다-레오나르도 다빈치
우리는 포스트잇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잘 알고 있다. 3M 회사에서 근무하는 스펜서 실버는 강한 접착제를 만들려다 실수로 잘 떨어지는 접착제를 만들어냈고, 우리가 아는 포스트잇은 거기에서 탄생했다. 우리 생의 과정에서 '실수'를 떼어놓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리도 실수를 싫어하는 것일까. 사회적인 추세나 배경이 우리로 하여금 실수를 하면 안 되게끔 만든 탓도 있겠고, 거기에서 파생된 완벽주의자들이 많아진 탓일지도 모르겠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완벽주의자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나를 그리 만들었는지, 원래의 기질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자신을 관찰하면 그런 성향이 두드러진다. 때로는 나 자신을 통제하고픈 욕구가 상당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그 욕구는 창조성을 방해한다. 완벽하길 바라는 탓에 아무것도 창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완벽주의는 시작공포증을 낳고, 그것은 또다시 자신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자신이 만든 틀에 갇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실수가 만든 아름다움의 순간을 발견한다. 거기에 더해서 실수의 자유로움은 우리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탈리아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스승 베로키오의 작품에서 도전적 열의가 빚어낸 실수를 하고 만다.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부분은 강아지와 물고기이다. 여기서 그는 일반적이지 않은 자신만의 방법을 적용하여 새로운 채색기법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 하지만 이 기술은 결국 그의 최초작이자 실수로 남게 된다. 이 작품에서 강아지를 자세히 보면 금방이라도 투명해질 듯 뒤의 배경이 비춰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물고기도 마찬가지 형상으로 보인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종종 완벽을 갈망한다. 더불어 이상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탓에 이상의 자신과 현실 속 자신의 괴리를 못 견뎌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상주의자이자 완벽주의자로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모든 과정에서 실수를 하고(분명히 실수하겠지만), 실수한 자기를 용서할 자신이 없었던 게 아닐까.'
이것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뼛속 깊은 자기 불신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창작해 낼 자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실수에서 허덕일 자신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철석같이 믿어왔던 패턴이 깨지는 순간이다. 사실 실수를 많이 했다는 것은 그만큼 시도를 많이 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종종 실수가 두려워 자신을 몰아세우고, '시도하지 않음'의 안락함에서 안도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 안도감에 불과하다. 한 살 한 살 먹으며 후회하는 것은 결국 진실로, 하지 않은 것에 있다. 우리가 자주 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하고 후회하는 것이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고.'이 말을 귀에 익숙한 문장으로 받아들이다가 어느 순간 가슴을 후려칠 때가 온다. 그러다가 깨닫게 된다. '나는 진실하게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냈는가. '
우리의 인생을 100% 공허감 없이 충만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순간순간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는 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행위에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 정직함이 가져다 줄 보상은 나 자신에 대한 만족이다. 그리고 '실수'는 '정직함'의 연료로 기능할 것이다. 더 이상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실로 가장 두려워할 것은 '실수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아니라 훗날 맞이하게 될 자신과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