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작가노트- 미지(未知)
그는 무엇을 그릴지보다 그것을 꺼내놓아도 되는지를 먼저 생각했다. 안에 있는 것들은 이미 충분히 자라 있었지만 밖으로 나오는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손은 가끔 예전처럼 움직이려 했고, 그럴 때마다 그는 괜히 책상을 정리하거나 자리를 옮겼다.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라기보다 조금만 더 시간을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다시 시작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림은 아주 조용하게 사람의 태도를 바꿔버린다. 그래서 그는 종이를 꺼내는 대신 책상 위에 아무것도 놓지 않은 채 잠시 바라보았다. 머릿속에는 형상들이 분명하게 있었다. 꿈에서 보았던 기척, 동물과도 같았고 어떤 것은 너무 무거워 아직 이름을 부르기 어려웠던 것들.
그는 그것들이 지금 당장 나오지 않아도 자신에게서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를 가장 오래 붙잡은 건 두려움이 아니라 책임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이것들을 꺼낸다는 건 그저 그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겠다는 무거운 선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대신 손을 가만히 올려두고 그 기척들이 어디까지 다가와 있는지만 조용히 느껴보았다. 아직은 그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과 곧 움직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 상태로는, 더 이상 방안에 머물 수 없었다.
그에게는 새로운 시도 앞에서 그 자리를 벗어나는 습관이 있었고, 그는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나가서 걸어보기로, 발닿는대로 들어가보기로. 집근처에 있는 도서관에 들어간 그는 서가를 이리저리 걸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역사시간에나 보던 책이 눈에 띄었다. 무심코 책을 집어든 그는 기시감과 함께 그것들을 마주했다. 꿈 속의 뿌연 안개에 가려져 있던 형상들. 오래전부터 이름없이 거기에 남아있던 바로 그 동물들을.
이 브런치북은 소설도 에세이도 아닌, 마음의 창에서 꺼내온 감각을 적어 내려간 기록입니다.
‘그 사람’을 따라가며 자신의 감각이 머무는 지점을 천천히 느껴보셔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