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작가노트- 현무
그 형상은 이후로도 자주 떠올랐다. 꿈처럼 흐릿하지도 않았고, 책 속의 그림처럼 지나치게 생생하지도 않았다. 이미 여러 번 본 것처럼 그저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문득 이것이 자기 안에서만 생겨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겪지 않은 시간들, 자신이 살지 않았던 기억들까지 겹쳐진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일지 몰랐다.
언젠가 그는 칼 융의 책에서 '무의식에는 개인을 넘어서는 층이 있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 문장이 자신과는 먼 이야기로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이 형상을 바라보며 그 말이 몸의 감각으로 다가왔다. 이것은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라기보다 그를 통해 다시 모습을 얻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 순간 그는 이 모양이 늘 혼자가 아니었음을 알았다. 오래전부터 같은 방식으로 불려왔고, 같은 자리에서 많은 이들에 의해 기억된 그것이었다. '현무.' 그는 이 동물을 떠올리자마자 희안한 감각을 느꼈다. 무겁고 오래된 이름이었지만 자신과 그리 멀지 않게 느껴졌다. 현무를 바라보는 동안 그의 안쪽에서는 그 사람만의 언어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생각의 층위에서만 떠돌고 정리하지 않았던 것들,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던 생각들. 그는 늘 머릿속에서만 많은 말을 해왔다는 걸 그 순간에야 또렷하게 느꼈다.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해왔다는 것도. 그런데 이 동물 앞에서는 그 습관이 느슨해졌다. 미동도 없이 버티는 형상을 보고 있으니 살려고 발버둥치며 버텨온 생각들 역시 그대로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 안에 쌓여 있던 언어들을 조금씩 밖으로 옮겨도 되겠다고 느꼈다. 정리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형상은 그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드러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은 현무를 보며 처음으로 생각에 머문 감각을 넘어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손이, 천천히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이 브런치북은 소설도 에세이도 아닌, 마음의 창에서 꺼내온 감각을 적어 내려간 기록입니다.
‘그 사람’을 따라가며 자신의 감각이 머무는 지점을 천천히 느껴보셔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