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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금 Feb 18. 2020

마흔 되기

흔들리지 않는 불혹이 되는 법

지난 1월 중순 어느 날, 한 달간의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귀국했다. 오랜만에 시댁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나고 연말 연초의 다채로운 파티를 즐기면서 마음껏 여유를 부렸던 휴가였다.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이 있다면, 여행을 시작할 때는 30대였는데 끝나고 보니 40대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


분명 여행 중에는 나이를 전혀 먹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했고, New year's party를 했고, 연도는 2019에서 2020으로 변경되었지만 나는 나이를 먹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눈 밑에 자잘한 주름이 하나 더 생긴 것 같고, 흰머리는 더 자주 발견되는 듯하더니, 인천 공항을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에 들어서는 순간 온전히 한 살 더 먹은 기분이다.


그리고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언니가


"나금. 올해 몇 살이지?"


묻는다.


"마흔이요"


라는 대답에 언니는 갑자기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 되어버렸다. 한 뭉텅이의 생각 덩어리가 언니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눈이 살짝 흔들리던 순간의 그 표정. 내 나이 대비 언니의 나이를 가늠해서 슬픈 것일까,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날의 젊었던 내 얼굴이 오버랩되어 난처한 것일까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40대가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나이라는 거 알아? 정말 좋은 나이야!"


50대 언니가 하는 이야기이니 귀담아 들어본다. 끄덕끄덕. 그래, 20대는 질풍노도였고, 30대는 시행착오가 반복되는 시기였지. 이제 40대는.. 아, 하고 싶은 것이 나름 많다. 그리고 왠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속도로 가야 하는지 가늠이 와요. 이걸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요..."


약간의 아쉬움을 뱉어냈지만, 나름 30대에 많은 것들을 배우고 생산해내었으니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고 자축해본다. 특히 보물 같은 아이들 셋을 마흔 전에 얻었음이 가장 뿌듯하다. 임신과 출산, 육아로 소모된 시간들과 뒤쳐진 경력을 머릿속에 오버랩해보면 마음이 쓰리기도 하지만 경력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있어도 아이들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으니 후회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의 행군이 마무리되었다는 것. 평생 의지하고 마음을 나눌 짝을 찾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럽고 잔인한 여정이었는지 뒤돌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리다. 이제 평생의 동반자를 찾았으니 천만다행. 그 여정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도 않다.

최근에는 몸의 근육은 줄었지만 정신적인 근육은 많이 단단해졌음을 느낀다. 겸손하면서도 자신감에 넘치고, 인내하지만 열정은 살아있으며, 긴장 속에서도 넘치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여전히 부족하기에 하루하루 애를 쓰고 있지만 그래도 십 년 전의 나에 비하면 많이 발전했음을 깨닫는다. 나름 결실이 많은 십 년이었다. 아, 그런 나의 30대와 인사하는 시간도 제대로 못 가졌구나. 파란만장했던 나의 젊음이여, 고마웠어!


"지금부터 예순까지 얼마나 좋은데. 요즘은 일흔도 좋지만 아무래도 쇠약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40대의 여정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는데, 마주 본 언니는 60,70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직 거기까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낯선 마흔 이후에도 계속되는 인생이 앞에 있음을 깨닫는다. 나이의 많고 적음이 인생의 깊이를 결정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먼저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 언니의 모습에 새삼 감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주변의 또 다른 존재들- 엄마, 아빠,  나보다 몇 년 더 앞서 걷고 있는 나의 남편도 각자의 방식과 모습으로 인생을 만들어왔고 앞으로 만들어갈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매일의 삶이 쉽지 않지만 긍정하면서 이 길을 따로 또 함께 걸어가 봐요. 딸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손 잡을 수 있는 용기를 내어볼게요.  


지난 30년은 내 인생을 돌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벅찼다. 하지만 지금은 주변을 살필만한 힘이 생긴 것 같다. 몇 년 전만 해도 '정말 마흔이 되면 흔들리지 않는거야?'라는 의구심을 가졌었는데 이젠 흔들리지 않는 나이-불혹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   

나의 마흔은 주변 사람들을 좀 더 살피며 걸어봐야겠다. 나뭇가지 하나는 쉽게 부러지지만, 여럿을 함께 하면 쉽게 부러뜨릴 수 없는 것처럼, 함께 해서 흔들리지 않는 나이 마흔을 만들어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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