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디까지 맞춰야 할까?
기획자로서 가장 어려운 순간은 언제일까요?
제 경우에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이 다를 때입니다.
해달라는대로 하는 게 가장 쉬운 길이지만, 그게 아니라고 느껴질 때 가장 갈등이 됩니다.
그렇다고 제 의견만 밀어붙일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니즈"와 "원츠" 그 사이에서 기획자는 늘 고민합니다.
하영호신촌설렁탕의 하영호 대표님 자서전 출판 프로젝트를 리딩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브랜드는 이미 전국에 80개가 넘는 체인이 있고,
해외 진출에도 성공해 설렁탕 업계에서 상징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출판의 목적은 단순한 홍보나 판매가 아니었습니다.
클라이언트는 해당 분야의 권위자로서 입지를 굳히고,
창업 멘토로서 제2의 출발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인생사, 창업의 실패와 성공 스토리,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 예비 창업자들을 위한 실용적인 팁들.
이 모든 것을 한 권의 책에 담고 싶다는 게 그가 원하는 것이었죠.
넘치는 소재들을 모두 담은 원고도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죠.
이해는 합니다.
30년 넘게 현업에서 활동하고 노하우를 쌓아왔으니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요?
하지만 여기서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저는 단순히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클라이언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남에게 어떻게 인식되는가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이미 창업 노하우를 다룬 책들이 많습니다.
경험담을 담은 자서전도 넘쳐납니다. 그렇다면 이 책이 왜 읽혀야 할까요?
이 사람만의 고유한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저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경험을 모두 담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관통하는 하나의 철학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계획된 것보다 더 오랜 시간 인터뷰했습니다.
그의 인생을 담고 있는 하나의 철학이 나오기까지, 그 긴 이야기를 모두 들었습니다.
식당 사장은 종합예술가예요.
그는 어느날 '자신이 음식으로, 메뉴로, 장소로, 분위기로 고객들을 초대해
공연을 보여주고 지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30년을 그렇게 살아왔다고요.
그 때였습니다.
"설렁탕 마에스트로"라는 키워드가 탄생한 순간이었죠.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을 맞춰준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두 담아달라"는 요청에 "네"라고 말하는 길은 쉽습니다.
창업 팁도 있고, 인생사도 있고, 다 담으면 적당히 괜찮은 책이 되겠죠.
물론 요청대로 해서 제 시간을 아낄 수 있는 것도 중요하고요.
하지만 기획자로서 제가 맞춰드린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서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30년의 인생을 관통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무엇이 우선인가"
그것을 찾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클라이언트가 "모두 담고 싶다"고 할 때,
기획자의 책임은 "그것보다 앞서는 의미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일이 생겼습니다.
자서전이 나온 이후, 그는 "설렁탕 마에스트로"라는 포지셔닝으로
다양한 방송과 미디어에 등장했습니다.
30여 년 전 그가 창업을 준비하며 열심히 읽었다던
<월간식당>의 표지모델이 되기도 했고요.
책에서 정의한 고유한 철학,
"설렁탕 마에스트로"라는 말은 단순한 제목이 아닌
그를 가장 잘 표현하는 키워드가 되어
다른 이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이 다를 때, 기획자는 선택해야 합니다.
요청에만 응할 것인지,
아니면 긴 설득에 에너지를 쓰고 시간을 들여 새로운 의미를 찾을 것인지요.
전자는 빠르고 쉽겠지만 단지 일을 완수하는 것이고,
후자는 지리한 과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맞춰주기만 하는 사람은 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기획자의 책임은 '현상 그 너머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는 생각.
적어도 그걸 스스로 잊어버리기 전까지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