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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rick Oct 17. 2020

얼치기 휴머니스트가 보고 싶네!

수학관폭도_최북

그날 우리보다 여섯 살 위였던 얼치기 휴머니스트 A는 우리를 보며 눈물을 훔쳤다. 그날은 A와 동기 넷이 방학을 맞아 가까운 강촌으로 구곡폭포를 보러 갔던 날이었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20여 분을 걸어 힘들게 갔는데 가뭄 때문에 폭포는 보이지 않았다. 메마른 바닥만 보고 돌아온 그 날 저녁, 우린 친구 반지하 원룸에 모여 역시나 시답지 않은 얘기들로 시간을 때웠다. 그날 이야기는 자신이 얼마나 방황하고 있는지에 대해 경쟁하듯, 힘들고 방황하는 게 젊은 날의 큰 벼슬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드는 것으로 번졌다. 그 모습을 보고, 고작 우리보다 여섯 살 많았던 A는 그날 우릴 보며 울었다. A는 생김새(우리는 A를 서울 뺀질이라며 늘 놀렸다.)와 다르게 마음이 따뜻했던 사람이었다. 

구곡폭포 아래서

‘수하관폭도’ 이름 그대로 나무 아래서 폭포를 바라보는 모습이 담긴 그림이다. 중국의 이름난 시인 이백의 <망여산폭포>라는 시를 모티브로 그렸다는데, 대부분의 산수화가 그렇듯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 살아가는 관조적인 인간이 주제다. 그래서‘수하관폭도’ 속 인물은 고고한 선비로서 속세를 벗어나 세상의 이치에 대해 깨닫고자 하는 구도자로 비친다. 

한담을 나누는 선비 두 사람과 차를 끓이는 시동이 보인다. 푸른 옷의 선비가 오른손으로 폭포를 가리키며 흰옷의 선비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다. 손을 든 모양도 그렇고, 폭포에 가까이 앉아있는 것도 그렇고, 푸른 옷의 선비가 주인인 듯싶다. 흰옷 입은 선비가 인생에 고민이 있어 초야의 선비를 찾아왔다는 상상을 해본다. 흰옷 입은 선비는 어떤 고민을 갖고 초야의 선비를 찾아왔을까, 초야의 선비는 폭포를 가리키며 무슨 지혜를 나눠주고 있을까? 

최북의 ‘수하관폭도’ 사람을 참 편안하게 한다. 남종화의 영향으로 여름날의 짙은 습윤함을 잘도 묘사하였다. 또 벽의 크고 작은 형세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기법으로 작은 도끼로 내려치는 듯 그려(소부벽준) 폭포 주변의 바위들을 그리 모나지 않게 그렸으며, 후추 알같이 작고 둥그스름한 묵점을(호초점) 조밀하게 찍어 그린 폭포의 이끼와 풀은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물이 떨어지는 폭포 또한 과하지 않아 시원하면서도 한담을 나누기에 적당하다. 만약 좀 더 높은 곳에서 물이 콸콸 떨어지는 폭포였다면 폭포 소리에 묻혀 한담을 나눌 수 없었으리라. 다만 이 그림에서 아쉬운 건 시동 옆으로 키순서대로 서 있는 잣나무가 너무 인위적이라는데 있다. 차라리 삐죽빼죽 서 있던지. 혹은 물가의 나무처럼 옆으로 휘어져 있어도 어울리지 싶다. 

그 점은 아쉽지만, 대체로 바라보기 편안하다. 폭포에 눈을 두다가 자연스럽게 두 인물에 눈길이 간다. 옛 선비들은 비록 세상을 등지고 초야에 묻혀 지냈을지라도 세상 돌아가는 것에 눈 돌리지 않았다. 그들의 눈은 항상 세상과 백성을 향해 있었고 백성의 고달픈 삶을 애달파하는 휴머니스트였다. 저 폭포 아래에서 나라와 백성의 앞날을 이야기하는 푸른 옷의 선비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누굴 꼽을 수 있을까?

이 그림을 보니, 내 젊은 시절 고민이 있을 때 이야기 나눌 수 있던 A가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몇 해 전에 보았던 A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A는 아직도 휴머니스트로 밑바닥(?) 인생 옆에서 곁다리 하나 걸치고 있었다.‘수하관폭도’ 속 인물처럼 세상에 대해 지혜를 전할 내공은 없지만, 힘든 세상 술 한잔 걸치며 하루를 마감하는 이들을 위해 가끔은 눈물 한 번 훌쩍이며 사는 듯했다. 오늘따라 그 얼치기 휴머니스트가 보고 싶다. 전화나 한 번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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