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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rick Dec 08. 2020

소유와 과시 그리고 난

고야 _ 옷을 입은 마하

고야_옷을 입은 마하_프라도미술관 97×190cm(1803년 제작)
고야_옷을 벗은 마하_프라도미술관 97×190cm(1800년 제작)

내 첫 번째 유럽 여행은 현장체험학습연구회에서 다섯 명의 선후배와 간 14박 16일의 스페인이었다. 첫 유럽여행이어서도 그렇지만 함께 간 연구회 선후배들 손발이 너무나도 잘 맞아서 최고의 여행으로 기억된다. 난 전체적인 일정을 계획하고, 한 명은 답사지에서 길을 찾고, 두 명은 호텔을 예약하고 나머지 한 명은 해설을 맡았다. 정말 톱니바퀴가 맞아 돌아가듯 여행지에서 모든 것이 척척 맞았다.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여행지는 바르셀로나였는데 해변에서의 일을 잊지 못한다. 아침 일찍 조식을 먹고 해변을 걷고 있는데, 옆에 있던 후배가 뭔가 이상하다며 100m는 족히 떨어져 있을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자 지금 옷 벗고 있는 거 아냐?” 

정말 두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상의를 모두 벗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문화적 충격에 우리는 ‘와~~~’하고 입 밖으로 소리만 냈다. 그리고 어느새 그 여자는 그대로 바닷속으로 풍덩. 정말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아뿔싸 사진으로 남겨두는 건데.(특이한 경험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사진을 찍었다면 몰카범으로 현지 경찰서에 끌려가지 않았었을까 싶어 다행이다 싶기는 하다. 

오늘 같이 볼 그림은 스페인의 거장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의 옷을 벗은 마하와 옷을 입은 마하다. 

두 그림은 같은 화가가 같은 모델을 같은 장소에서 길게 누운 채 두 팔을 벌려 머리를 받치고 있는 자세로 하나는 옷을 입고 모습을, 다른 하나는 벗은 모습을 그렸다. 190㎝의 실물 크기로 성서나 신화가 아닌 현실의 인물을 그렸다. 또한, 전통적으로 누드화라면 지켜야 할 베누스 푸디카(Venus Pudica) 즉 한 손으론 가슴을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론 성기를 가리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도발적으로 당당하게 두 팔을 벌려 자신의 몸을 맘껏(?) 보라 하고 있다. 게다가 누드화에선 금기시되던 여성의 체모도 그대로 그렸다. 여러모로 천주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스페인에서 큰 이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논란거리로만 이 그림을 보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옷을 벗은 마하는 밝은 모델의 몸에 비해 주변을 어두운 색조로 칠하면서 명암의 대비를 뚜렷하게 하여 관람객에게 모델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희고 매끈한 모델의 상체에 비해 하체는 약간 구릿빛으로 채색하면서 변화를 주어 하이라이트인 가슴 부분에 포인트를 주고 있다. 

옷을 입은 마하는 몸매에 딱 달라붙는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허리에는 조금은 넓은 허리끈으로 묶어 잘록한 허리를 유난히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상의는 원피스 위에 노란빛과 황금색의 볼레로(스페인 전통의상)를 입고 있어 그 화려함이 미모를 더해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자칫 놓일 수 있는 모델의 발 부분엔 황금색 신발을 신겨 디테일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위의 두 그림은 모두 18세기 스페인의 재상이었던 마누엘 고도이가 주문한 그림이다. 마누엘 고도이는 옷을 입은 마하 뒤에 옷을 벗을 마하를 전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집에 사람들이 올 때면 옷을 입은 마하를 먼저 보여준 후 그림을 천천히 위로 올리면서 옷을 벗은 마하를 볼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마치 그림 속 아름다운 모델이 관람객을 보면서 옷을 벗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퍼포먼스를 했다고 한다. 

이 그림들의 모델은 과연 누구일까? 고야와 마누엘 고도이의 둘 모두에게 애인이었던 알바공작부인이라는 설도 있고, 마누엘 고도이의 또 다른 애인인 배우 출신의 페피타 투토라는 이야기도 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마누엘 고도이가 그림 속의 모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있다. 마누엘 고도이는 모델 속 인물에 대해서 사랑과 존중보다는 소유와 과시의 마음이 더 강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근대까지의 누드화는 대부분 관람자 혹은 주문자의 눈요기라는 한계가 담겨있다. 

사실 나부터도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의도치 않게 가슴에 시선을 두었다. 

아무래도 가슴 사이가 너무 벌어져 있는 것도 그렇고 동그란 가슴이 그리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중력을 거슬리고 봉긋하게 솟았다고 연구회 선배에게 말했다가 논쟁(?)이 붙었다. 선배는‘아무래도 젊은 여성이다 보니 가슴이 처지지 않고 저렇게 솟아있다.’ 라 했다. 옥신각신 서로 뜬구름 잡는 얘기를 한 참 하고 있는데 뒤통수에서 살짝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아뿔싸! 한 무리의 단체 여행객이 귀에는 수신기를 꽂고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국인들이. 게다가 내 뒤에는 젊은 한국인 여성이…. 에고~~  얼굴이 화끈화끈하고 어디라도 숨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나와버렸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그림 읽기를 수업하면서 아이들에게 당당하게 작품으로 볼 것을 말하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런 야한 건(?) 숨어 보던 습관 때문인지 왠지 움츠러들게 된다. 아직 우리 세대에서 벌거벗은 여자의 몸을 대놓고 보고 평을 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제야 드는 생각은 꼭 그렇게 도망치듯 나왔어야 했는가 싶지만, 그땐 그랬다.     미술작품으로서 누드화를 대하는 것도 한 번 더 생각해볼 게 여지가 있다. 작품은 작품일 뿐이라 하지만 주문자와 또 창작자의 의도는 순순한 마음이지 않을 수도 있다. 마누엘 고도이와 같이 소유와 과시의 욕구의 결과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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