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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rick Oct 17. 2020

가난의 낭만

선동도해_심사정

  이덕무는 청언소품(淸言小品)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날 밤 나는 분명, 나를 위해 이불이 되어준 <한서>의 몸놀림을 보았고, 제 몸으로 바람을 막아 보라는 <논어>의 목소리를 들었다.’ - 《책만 보는 바보》 중 - 


  추운 겨울밤 <한서>를 풀어 이불처럼 덮고, <논어>로 문풍지 삼아 바람을 막았다니!(우리 옛 책은 끈으로 묶기 때문에 책을 풀었다 묶었다 할 수 있었다.) 이덕무는 서얼이었고 정말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한겨울의 추위를 <한서>와 <논어>로 이겨낼 줄이야.  가난하여도‘낭만’을 잃지 않는 그런 이었다. 

여기, 그 가난함에 대한 그림이 있다. 다 해어진 옷을 입은 가난한 아이가 풀이 죽어 땅바닥에 쪼그려 앉은 듯한 그림, 바로 심사정의 <선동도해(仙童渡海)>다. 제목만 보면 ‘선동(仙童, 신선의 시중을 든다는 아이)’이 바다를 건너는 그림인데, ‘선동’은 무슨, 어디 동네의 어린 거지로 보일 뿐이다.

  얼굴을 두 팔에 괸 채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있는 아이. 눈썹은 치켜 올라가 있고 두 눈을 살짝 뜬 채 아래를 빼꼼히 보고 있다. 아이의 자세로 보아서는 무언가에 시큰둥해 보이기도 하고, 외롭고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아이의 발밑으론 푸르스름한 물결이 일고 있고 엉덩이에 나뭇가지를 깔고 앉아 바다를 건너고 있다. 얼핏 보면 어떻게 이렇게 못 그렸나 싶기도 하지만 필선의 진하고 연함이 자연스럽고 수묵담채의 그림에서 대가의 향기가 느껴진다. 심사정이 누구인가?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3원 3재 중 1인으로 천재라 불린 이다.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고사에는 ‘선동이 바다를 건넜다’는 이야기는 없다. 이 그림은 아마도 진시황과 달마의 이야기가 합쳐진 것이다. 진시황이 불사의 약을 찾기 위해 남녀 아이 수천 명을 동해를 보냈다는 이야기와 달마가 양나라에 들렀다가 낙양 소림사로 갈 때 갈대를 타고 건넜다는 이야기가 합쳐져서 <선동도해>의 바탕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심사정은 사대부가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역모 사건으로 직업 화가의 길을 걸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하루 아침에 멸문지화를(18세) 겪고, 죽어서도 돈이 없어 장례를 치르지 못하다 지인들의 십시일반으로 간신히 묘에 안장될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을 정리한 묘비명에는 ‘50년간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다. 궁핍하고 천대받는 괴로움이나 모욕을 받는 부끄러움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귀신도 감동하게 할 경지에 이르러 멀리 이국 땅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이라 적혀 있다. 천재의 삶치고는 참 기구하다.

  심사정은 <선동도해>에서 ‘선동’에게 자신의 현실과 이상을 투영했다. 대역죄인의 자손이라는 현실에서 세상을 향해 큰소리치며 마주할 수 없어 외롭고 불쌍하게 쪼그려 앉을 수밖에 없는 자신, 그런데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은 체 파도가 일렁이는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사색의 시간이 있다. 달마가 갈대를 타고 강을 건너 소림사에서 면벽의 시간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듯 심사정 또한 깨달음을 위한 작은 몸짓을 하고 있다. 가난이 베어 그를 고달프게 했지만, 이덕무가 낭만으로 그 시절을 이겨냈듯 심사정은 사색의 시간으로 그 시절을 이겨내고 있다. 

  나의 가난했던 시절도 떠오른다. 우리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어린 날 두고 부모님 두 분 모두 일을 나가셨다. 아침 일찍 일을 나가셨으니 이른 아침부터 혼자 있어야 했다. 정말이지 동네에 내 또래가 한 명도 없어 온종일 혼자 지내야 했다. 골목길 구석구석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해보기도 하고, 집 앞 둑 넘어 개울가에 나가 모래를 이리저리 뒤척여도 보았다. 그림 속 선동이 꼭 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우리 동네에 또래가 이사를 왔다. 금새 단짝 친구가 되었고, 이제는 하루를 그 친구와 보낼 수 있었다. 더 좋았던 건 그 친구에겐 예쁜 여동생이 있었고 집에 엄마도 계셨다. 그 친구네 집에서 밥도 많이 얻어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와 놀 때 가장 좋았던 건 친구의 엄마가 시장에 가신 날이었다. 친구네 집엔 다락방이 있었는데 거기를 아지트로, 골동품을 보물로 둔갑시켜 놀 수 있었다. 그리고 더욱더 좋았던 건 친구 엄마가 시장을 다녀오실 때면 항상 꿀떡을 사 오신 거였다. 지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떡은 꿀떡이다. 어렸을 때를 되돌아보면 가난해서 혼자 있었어야 한다는 지긋지긋한 쓸쓸함도 기억나지만, 친구와 친구의 가족이 내게 전해 준 따뜻함도 기억난다. 친구가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안다면 지금이라도 연락해서 친구 어머님께 감사하다 말씀드리면서 맛있는 저녁 한 끼 대접해드리고 싶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이덕무와 심사정 그리고 나.

  가난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그 시절을 이겨낸 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몇 개의 따뜻한 기억도 덧붙여 생각나는 것을 보면 그래도 잘 버텼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가난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런 것과 어우러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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