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 살아라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요즘처럼 돈 벌기 쉬운 세상이 어디 있냐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이것저것 다 떼어주고 나면 남는 거 정말 없다고.
병철은 속으로 생각했다.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과
노인들 빨리 죽고 싶다는 말
그리고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은 오랜 거짓말이라던데...
병철이 장사를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렇다고 특별히 장사 밑천이 있어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처음으로 장사란 것을 시작한 이유는 간단했다.
야간 기술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병철에게 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구로 공단(1)에 처박혀 일하거나 청계천 공구상에서(2) 잡일을 하며 기술을 익히는 일이었다.
결국은 영등포 문래동(3) 뒷골목에서 기름때 묻은 작업복 걸치고 살 것이 뻔했다.
그나마 대학 간 친구들은 기업에 취직하거나
공무원 시험 봐서 쥐꼬리지만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별다른 학력도, 인맥도 없는 병철의 얕은 기술은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은 그래도 번듯한 중소기업 직원이었다.
선반으로 작업한 부품을 대기업에 납품하던 회사는 직원이 30명이나 되었다.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야간 근무는 일상이었지만 나름 나쁘지 않았다.
기본급은 낮았지만 그래도 연장이다 야근이다 하며 나름의 수당으로 월급을 대신하였다.
가끔은 상여금이나 성과급이니 하며 챙겨주는 보너수도 있었고 명절엔 좀 더 풍성했다.
밥은 공장 한편에 마련된 회사 식당에서 해결할 수 있었고
공짜는 아니었지만 집이 먼 친구들은 회사 기숙사를 빌려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일주일에 하루는 쉴 수가 있어서
마음껏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잔업까지 생각하면 병철은 숨이 턱에 찼다.
그래도 유일한 휴일이 있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어느 날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무실 박 과장이 경리 아가씨를 꼬셔 회사돈을 횡령했다는 소리부터
대기업이 회사 기술을 사들여 더 이상 납품할 필요가 없어졌다느니
사장님이 노름판에 돈을 날려 회사가 넘어가게 생겼다는 이상한 소문들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들은 실제 월급날에 현실이 되고 말았다.
월급날이 되면 언제나 사무실 청소를 하던 경리 아가씨도 박 과장도 출근을 하지 않았다.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영문도 모른 체
직원들은 지루한 오후를 사무실 복도에 앉아 있어야 했다.
병철이 처음 찾은 것은 동대문 시장이었다.
대한민국 퍠션의 메카였다.
낮이고 밤이고 젊은이들은 두타로 몰려들었고
밤에 열리는 야간 시장은 새벽까지
전국에서 상경한 장사치들로 북적였다.
젊은 아가씨부터 제법 오랜 경륜이 느껴지는 사장님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청평화와 제일평화시장을 돌았고
짐꾼들의 지게며 오토바이는 바쁘게 좁은 시장 바닥을 누볐다.
그렇게 한 밤에 꾸려진 무더기 옷가지들은 바리바리 전국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병철의 옷 장사가 시작되었다.
공돌이의 패션 감각은 은근히 작은 동네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곧 망할 것 같던 가계는 어찌어찌 돌아갔고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을 버텼다.
그리고 병철의 손에 쥐어진 얼마 안 되는 노력의 산물을 고맙게 여겼다.
그러나 그런 달콤함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병철은 동대문에서 청바지만 다루었다.
1961년 평화시장에서 시작한 권종열 회장의 뱅뱅도
1982년 광장시장에서 여성복 크로커다일로 시작한 최병오 회장의 크라운(형지)도
동대문 보세 매장에서 시작해 3천억 신화를 일군 TBJ도
주력 상품은 청바지였다.
병철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장사치에게 중요한 것은 정보와 속도였다.
누구보다 빠르게 새로운 스타일의 청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많은 양의 청바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장사치의 돈 주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동대문 도매상들 역시 돈 냄새를 귀신처럼 알아차렸다.
병철이 나타나는 밤에는 숨겨 놨던 새로운 청바지가 등장했다.
병철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도매상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는 아니란 것을...
술 한잔의 힘이었다.
그리고 가끔의 선물과 입에 발린 아부의 역량이기도 했다.
사회에서 멸시당하고 집안에서 당하는 업신 여김에 장사치 들은 치를 떨었다.
때문에 병철이 가계를 들어서면 은근한 기대를 하였다.
병철이 가져갈 물량과
그의 혀와 가방에서 새어 나올 달콤한 기대치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짧은 혀와 지식으로 던져 줄 한 마디 훈수 재미도 있었다.
장사는 신용이다.
신용은 돈이다.
신용이 사람이면 필망이다.
병철의 오더는 정확했다.
다음 시즌 청바지는 프린팅 된 청바지였다.(4)
우연히 가계를 찾은 한 여학생이 입었던 청바지가 인상적이었다.
화려한 동물이 새겨진 처음 보는 스타일의 청바지였다.
병철은 과감하게 투자해야 돈을 벌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동대문 주변 봉제공장을 찾아다녔다.
창신동 봉재골목은 신세계였다.(5)
중간상을 거치지 않으니 돈이은 2배에서 10배로 늘어갔다.
대박이었다.
소문은 빠르게 번져 나갔다.
그리고 그날의 파국이 찾아왔다.
누구도 장사치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사업자를 내어주던 세무서도
기장을 맡아주던 회계사도
깐깐하고 거만하던 대출 창구 직원도
그렇게 창업을 독려하고 권장하던 정부도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악수를 청하던 지자체장도
망한 가계를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병철이 기다리던...
월급날의 회사 복도에서 느꼈던 막연한 두려움과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돈을 회수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기간이 아직 남아 있지 않습니까
말미를 더 주세요.
그동안 이 은행에서 쌓은 신용이 얼만데...
우린 모르는 일입니다.
정부 정책이 그런데 우린 들 용빼는 제주가 있습니까?
장사치라 뭘 모르시나 본데...
대출 그거 우리 마음대로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간단하게
은행 직원 한마디에 대출이 회수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렇게 간단하게
공무원들이 들이닥칠 수 있다는 것을 병철은 알지 못했다.
특별사법경찰관들이 들이닥치고
특별 세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해도 할 수 없던 단어들이 터져 나옸다.
상표권, 디자인권, 저작권 침해...
그렇게 간단히 장사가 끝이 날 수 있다는 것을 병철은 알지 못했다.
오래전 회사 사장의 얼굴이 떠 올랐다.
미안합니다...
사장은 직원들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고 있었다.
1. 구로공단 (현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은 1960년대 조성된 한국 최초의 수도권 국가산업단지로, 봉제, 전자, 섬유 등 경공업의 중심지였다. 수많은 젊은 공장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일하며 한국의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현재는 첨단 IT 산업 중심지인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었다.
2. 청계천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다양한 부품과 공구들을 구할 수 있었던 곳으로 수많은 기술자들이 모여 소규모 공장과 상가를 운영했다. 이들은 자동차 부속품부터 정밀 기계까지 다양한 제품을 만들고 수리하며 '기술자의 요람' 역할을 했다.
3. 영등포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근대 산업 시설이 들어서면서 산업화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역이다. 방직 공장, 맥주 공장 등 다양한 공장들이 있었으며, 특히 문래동에는 철공소와 기계 관련 공장들이 모여 있었다.
4. 2000년대 초 프린트 청바지가 큰 인기를 끌었다. 로베르토 카발리(Roberto Cavalli) 같은 디자이너는 화려한 애니멀 프린트나 바로크 문양 등을 선보이며 트렌드를 주도했다. 당시에는 로우 라이즈 핏과 함께 매치하는 것이 유행이었고 2020년대 이후에는 그래픽 패턴과 추상적인 무늬 등 다양한 프린트가 등장하고 있으며 디젤(Diesel)이나 블러마린(Blumarine) 같은 브랜드들이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이끌고 있다. 현재는 와이드 레그나 부츠컷과 같은 같은 편안한 실루엣에 프린트가 가미된 스타일이 인기를 얻고 있으며 친환경 소재나 지속 가능한 생산 방식이 결합된 프린트 데님 제품도 부상하고 있다.
5. 창신동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곳으로 1970~80년대 동대문 평화시장과 함께 한국 봉제 산업의 중심지였다. '미싱이 돌고 돌던' 마을로 불리며 좁은 골목마다 작은 봉제 공장들이 밀집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