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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진 Oct 18. 2022

어린이의 사랑

[연재] 하루에도 내 마음은 사계절




아이 얼굴은 연못이다. 보드라운 핑크빛 연꽃이 봉긋 솟아 떠오르듯, 얼굴 가득 설렘의 꽃이 폈다. 볼이 발그레하고, 수줍게 모아 내는 미소는 꼭 여름 자두를 닮았다. 아직 애기 티가 나는 양볼이 입꼬리 위에서 들썩 거린다. 기분 좋은 표정인지,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씰룩씰룩 거리는 입가에서 부끄러움이 조금 새어 나오는데, 딸의 이런 표정은 처음 본다.


“학교에서 엄청난 일이 있었어! 엄마, 진짜 큰일이야. 어떻게 하면 좋아?!”


짝을 삼 개월에 한 번 씩 바꾸는 아이의 반은 자신이 원하는 친구들의 이름을 써내면 교사가 잘 현명하게 잘 조합시켜 안게 한다. 그 무렵, 아이는 자신만 자신이 함께 앉고 싶어 하던 친구가 한 명도 안되었다고, 자신만 혼자 남자 짝이라고 속상해했었다.

자기한테 엄청 개구쟁이처럼 구는 남자아이, J와 짝이 됐다.


J는 신사다웠다. 어느 날 남자아이 무리들은 딸 포함 친하게 지내는 여자 아이들에게 공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 그릇을 가져다주는 건 기본, 식사 후에는 깨끗이 치워주는 것은 물론, 가방까지 들어주고, 온몸을 굽혀 공주 영화에나 나올 법한 무도회에서 춤을 청하는 왕자들처럼 굴었다. 까르르 웃고, 가방을 맡기고, 서로 식탁에서 이야기하고. 한동안 유행처럼 아이들은 이렇게 지냈다.


“어쩜 조오 오오 아! J가 글쎄 드디어 고백했어!”

이미 아이들은 매일같이 고백하고 거절하고 받아주며 감정을 주고받고 있었다. 일종의 놀이처럼 사소하게, 어른인 내가 보면 웃기고 귀여운 일이다.

학교 운동장 안 트램펄린에서 결혼식을 올렸대나, 친구들이 동그랗게 트램펄린 주변에 앉고, 가운데에서 서로 손을 잡고 세 번 뛰는 거란다, 옆에 있는 나무에 손을 뻗어 초록 잎을 선물했다나, 나뭇가지 두 개로 젓가락으로 돌을 집는 것도 세리머니로 보여줬다고. 촵촵 챱스틱이라며.


엄마인 내게도 이상하게 아이 얼굴에 핀 연꽃처럼 환한 핑크빛 미소가 퍼졌다. 이날 저녁 식탁은 우리 모두 들떴다. 어떤 '감정' 그러니까 우리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마음속 파도를 일으키는 어떤 자극이 나의 작은 소녀에게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떨림으로 바라보는 것,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감정, 이맘때 즈음, 아이 학교에서는 공교육을 통한 성교육을 시작한다. 한국 교육과정으로 치면 5학년. 그리고 그보다 앞서 ‘감정’ (Gefühl)에 대해 배운다.


기분, 감정이라고 불리는 단어에 대한 주제에 대해 독일 공교육에서는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직전 유치원 과정, 초등학교 1학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학년에 교과 과정으로 넣어 가르친다. 한국으로써는 초등학교 4학년 끝자락에 성의 분별, 감수성에 대응하여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개인의 감정’에 대에 폭넓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장을 열어두는 셈이다. 아이의 학급에서 진행된 감정에 대한 커리큘럼을 관심 있게 살펴보았다. 자신의 표정에 체크를 하게 한다. 그리고 공개하며 상황의 이유를 서로 교실에서 발표한다. 감정은 드러나며, 드러내는 순간 공유된다.

좋은 인사이트가 아닐 수 없다.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짜증 나!”라는 말은 듣기 좋지 않아. 그런 말로 기분을 표현할 필요가 없어.라고 말했다.

사춘기인 아이가 대답한다.

“엄마, 그런데 '짜증 나'라는 말도 기분을 표현하는 말인데? 왜 하면 안 돼? 내 감정을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이를 존중하기로 했던 나의 마음이 무색하게 되는 순간, 나도 감정이 있다고!라는 말로 내 머리를 띵, 하게 만들고 이윽고 이어지는 목소리.


“엄마, 알아? 나 사춘기야!”


자신이 사춘기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의 얼굴 저편에 여전히 커다란 연꽃들이 탐스럽게 피어 있다. 사춘기는 '단순히 짜증이 나는 시기' '반항하는 시기' '말대꾸하는 시기'가 아니다. 성의 다름을 알아 가는 실로 자연스러운 시기다. 사춘기는 자주 아이의 말과 엄마의 말이 서로 감정적으로 섞여 선인장의 가시처럼 메마르고 뾰족할지 모르나, 누군가에게 큐피드 화살을 맞고 난 후 깊고 순수한 샘 아래로 떨어져, 다시 뭍가로 올라올 수 있는 힘, 그것으로 보드라운 연꽃을 피워내게 하는 거다. 사춘기 아이의 시절은 가끔 엄마인 내게 선인장의 가시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의 모양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끼는 어린이의 마음에 당당하고 수줍게 뜬 연꽃일 것이다. 아마도 분명 그럴 것이다.


만 10세, 사랑이 시작되는 나이, 사춘기.






<하루에도 내 마음은 사계절>


아이와 엄마의 사춘기 성장 기록을 연재합니다


- 아이가 어느새 사춘기를 맞았나 봅니다. 엄마도 아이와 함께 자란다면, 까마득한 오래전 사춘기 말고, 엄마에게도 또 다른 사춘기가 오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나의 아이와 함께 이 시절을 겪으니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알아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끔 우리에게 적당한 편지와 적당한 글을 들려주고, 지금을 기록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보듬어 줄 것입니다. 가장 희망적인 방식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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