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식탁

오늘의 발견, (괄호 넣기)

by 박소진



그날의 식탁





집에 있는 가장 넓은 접시를 꺼내 치즈를 한 장, 한 장씩 떼어, 줄을 맞춰 깔아 놓는다. 집주인의 취향대로 고른 냅킨을 또 그의 취향대로 접고, 저녁 식사를 함께할 사람 수 대로 식기와 컵, 포크, 나이프를 찬장에서 꺼내 온다. 식탁에 가까이 놓은 작은 테이블 위에 물 몇 병과 과일주스, 탄산음료 따위를 세워 놓고, 와인은 식탁 가운데에 놓는다. 모든 사람은 대부분 처음 만났고, 몇몇 사람들은 메인 메뉴를 먹는 방법을 몰라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를 물었다. 또 한 사람은 채식주의자였다. 그는 나이프로 감자와 올리브를 썰다 종종 식탁 밑으로 떨어뜨렸고, 몇몇 사람들은 편식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들이 가진 이름의 유래에 대해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몇몇 사람들은 경청했고 몇몇 사람들은 서로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황색의 할로겐램프가 식탁 위에서 모두의 머리 위를 밝혀주었다. 열기가 없는 빛이라 지금의 분위기를 감싸 주기에 어쩌면 다행일 거라 생각했다.


침묵과 침묵을 깬 발화, 그리고 이어지는 웃음. 아직 경계를 풀지 못하는 어색함이 공존한다. 웃음과 웃음의 결에는 서로 간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외국어가 서툴러서 초대를 받은 식탁에서 누군가가 웃으면 같이 웃었다. 대충 어림잡아 생각하는 거다. 웃음의 결을 상상하고 짐작하는 능력이 탁월하게 늘어갔다. 어느 한 번은 나의 이웃이 독일로 이사 온 우리 가정을 그릴 파티에 초대했다. 외국인으로부터의 첫 초대였다. 독일식 그릴 파티는 보통 소시지 혹은 돼지고기 정도를 굽는다. 식탁 위에 올라오는 잘 구워진 소시지를 사이에 두고 공감을 살 만한 경험담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테이블 앞에 올려놨다. 누군가 웃으면 따라 웃는 방식으로 공감을 표현했다. 그것은 조금 피로한 일이었다. 입꼬리를 조금 올려두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할 때 즈음 식사는 끝났고, 나름 분위기를 망치지 않았다는 점 정도로 그날의 분위기를 기억해두기로 했다.


담화 사이의 어색함이란 것은 텍스트로 환원하게 되면, 문단과 문단 사이의 행간에 초침이 생기는 것과 비슷하다. 진즉 서로 알지 못하던 사람과의 첫 만남, 친구의 친구를 만나는 자리, 알고 싶지 않지만 관계 맺음을 해야만 하는 사람과의 만남, 그 사이에 잔류하고 부류 하며 스며드는 문장들 속의 침묵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 각자는 스스로 자신이 가진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하여 각자의 역사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나 생각들을 풀어내게 되고 이것이 타인에게 진솔하게 느껴지는 순간, 많은 이들은 그의 말 앞에 자세를 곶혀 앉는다. 누군가의 말이 유쾌하고, 테이블 너머로 웃음과 미소가 건네지는 시간이다. 그들의 대화가 의미 있어 보이는 순간 그 날의 식탁은 꽤 아름다운 분위기를 풍기고, 서로의 기억에 오랫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각자 지닌 채로 공동의 식탁에서 만난다. 나의 생을 우리의 식탁 위로 올려 펼쳐낸다. 그것이 때로는 그 날의 식탁에 모인 사람들에게 특별한 것일 수도, 그다지 중요했던 순간이 아닐 것일 수도,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는 그 날의 테이블에서 주인공이 되고, 또 조용히 앉아있던 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후자인 경우에도 그에게 그 날의 식탁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가장 작은 문장을 꺼낸 소중한 하루가 될 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의 대화를 기억하기 위해 공동의 식탁 위 꺼낸다. 따뜻하고 귀한 음식들 위로 잔이 채워지고, 몇 번의 건배를 하는 동안 어색함은 사라져 조금 더 서로를 기억할 수 있도록.


집주인의 초대, 그 날의 식탁
내가 준비한 어느 해의 크리스마스 저녁 테이블


볼프강의 결혼식 테이블


이 사진 속 식탁 위로 서로가 공유한 문장들을 기억한다. 지나 온 장소를 함께했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때 나눈 대화들을 또 다른 날에 꺼내 놓을 수 있을 식탁 앞에 앉아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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