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정원 4와 5 번지

오늘의 발견, (괄호 넣기)

by 박소진



너의 정원 4와 5 번지 *





길 건너 앞 집에 노부부가 살고 있다. 보통 독일의 집들은 길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집들이 나뉘어 있고, 같은 거리 이름을 공유하며 이웃으로 지낸다. 공유하는 길은 집주소로 쓰이는데, 그 길은 넓지 않아서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으면, 보통 상대의 집이 훤히 보인다. 나의 길은 "너의 정원에서"이다. 창 밖은 작은 세계 같아서 그 집 할머니는 창문가에 앉아 하루 종일 밖을 내다보는 일로 하루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집 부엌 창문 건너 그들의 부엌이 마주한다. 한 번은 감자나 양파, 물 같은 무거운 식료품들을 할아버지가 옮기 시길래, 집까지 올려다 드린 적이 있다. 그게 고마워서 성탄절 전야에 작은 초콜릿들을 가지고 집 초인종을 누른 적이 있다. 우리가 집에 들어오고 나갈 적에는 창문 안에서 손을 흔들기도 한다. 가끔 마트에 제철 과일이 평소보다 싱싱할 때면, 노부부가 생각난다. 그래서 귤이나 하우스 딸기나 하는 것들을 한 봉지 더 사 선물하기도 한다. 자식들도 먼 곳에 사는지, 혹은 가까이 있어도 오지 않는지, 그들을 찾아오는 가족은 본 적이 없다. 마트를 가는 것은 주로 남편이 한다. 그리 고물이 아닌 차가 그에게 필수 불가결한 이동 수단이다. 교회를 가는 일요일을 빼면, 보통 창 안에서만 생활하는 아내는, 볕이 좋은 날이면 남편의 팔을 잡고 지팡이를 기대어 천천히 산책을 하러 걸어 나온다. 나의 창 밖의 또 다른 창 속에 거기, 그들이 존재하며 살아가는 거다.


얼마 전에는 정기적으로 노부부의 생활을 확인하러 오는 사회 복지사로 보이는 여자가 그들의 집에서 나오면서 우는 장면을 보았다. 이번에도 노부부는 여전히, 창 안에서 그녀를 보고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창문 안에서 그들의 상반신만 보이는데, 그게 마치 어디론가 떠나는 기차에서 작별인사를 하는 듯, 갑자기 어느 날 멀어질 존재들의 실루엣처럼.


나는 또 노부부의 나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여든여섯 세의 할아버지와 아흔넷의 할머니. 남편은 아내가 아프다고 했다. 그 날 이후, 직관이 사실이 되지 않는 날이 오길 바라는 순간이 잦다. 창 너머로 그들이 오늘도 저녁을 잘 준비하기를, 너무 무거운 식료품을 실어 오는 날에는 내가 우연히도 창 밖을 보고 있기를, 그래서 조금이라도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기를.


‘왜 사회 복지사는 그 집에서 울면서 나왔을까?’


며칠 전의 마주침이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길, 그 이른 오전에 할아버지가 집이 아닌 다른 방향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몇 마디의 짧은 대화를 나눴다. “오늘 내가 물을 사다 드릴까요?” 할아버지는 괜찮다 했다. 쌀쌀한 아침의 바람이 그의 목덜미를 쓸쓸하게 치고 불어 나간다.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어, 저 쪽은 시립 묘지가 있는데?’


그들의 나이를 알고부터, 나는 창 밖을 더 자주 보았고, 우리에게 창 속에서 건네는 손 인사 너머로 아내의 낯빛을 더 자세히 본다. 묘지 쪽으로부터 종이쪽지를 접어 셔츠 주머니에 꾸겨 넣고 걸어오는 할아버지의 발걸음이 겹친다. 물론, 오전에 산책을 다녀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길은 그의 동선에서 벗어난다. 그들도 나를 보듯, 나도 창 밖으로 그들을 계속 관찰해서 안다. 그는 혼자 산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 그는 묘지 쪽에서 걸어왔을까? 아내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 기온이 봄처럼 느닷없이 오르다가 떨어진 아침이었다. 갑자기 몸에 생채기가 나는 듯, 오한이 들었다.


우리가 공유하는 길, 다이앤 가르텐 위 집들의 정원에는 벌써 봄소식이 왔다. 길 위에 싹이 올라왔다. 자신도 모르게 바람에 날려 씨앗이 번식하는 경우의 들꽃이 아니라, 구근 씨앗이 땅 속에 있어야만 피는 꽃들의 싹이 피어오른다. 수선화, 히아신스, 튤립 같은 구근식물이다. 둥근 뿌리 식물. 나도 여러 종류의 구근 식물을 정원에 심었었는데, 그 해 봄이 끝나면 마치 죽어버린 것 같았으나 이듬해, 겨울이 지겨워질 무렵 그 자리에 다시 자라나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뿌리 어딘가에는 ‘삶을 기억하려는’ 생명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생명이 생명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꽃이 한 계절의 끝에서 죽어가는 것처럼 사그라들면, 그 짧은 역사를 뿌리가 담는 듯하다. 꽃도 자신의 생 동안 일어나는 일 들을 온몸에 담고 다음 해에 새롭게 피어내겠지. 나처럼, 노부부도 올해 우리들의 길 위에 있는 봄 꽃들을 보겠지.


어차피 시간이 지나 여기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라진다 해도 나는 기억할 것이다. 노부부가 더 이상 여기 살게 되지 않을 때가 오고, 그래서 집 터가 부수어져 새로운 건물이 생기거나, 그곳에 또 다른 새로운 사람들이 온다고 해도 여기 창 너머, 내게 중요한 사람들이 있었고, 어느 해 동안에는 그들이 아주 아주 오랫동안 건강하길 바라던 나의 순간들을 잊지 않으려 한다. 시인이 지상의 언어와 그 선 너머의 언어를 빌릴 수 있는 자라면, 그래서 내가 창 너머의 노부부에게 들려줄 수 있는 시가 있다면 이런 방식일 것이다.


우리의 길 위에 어김없이 필 봄 꽃의 씨앗 속에 담아두는 거로.

그들의 삶이 시 같기도, 혹은 전혀 시 같지 않기를.












너의 정원 4와 5 번지 * : 독일어로 “Deiengarten”으로 쓴다. 한국어로는 “너의 정원”으로 번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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