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상
남자의 입술에서 버터 맛이 났다. 일찍이 버터를 잔뜩 발라 구운 토스트를 먹었을 것이다. 혼자 요리했을 것이고, 혼자 먹었을 것이다. 홀로 조용히 무언가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남자는 글씨를 잘 쓸 것이다. 남자는 금속 재질로 된 연필깎이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오래 연필을 깎을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책상에 떨어진 흑연을 깨끗하게 모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종이의 무게를 정확하게 잴 수 있을 것이다. 손을 깨끗하게 씻고 아끼는 책의 첫 장을 넘길 것이다. 남자는 책장을 넘기다 책장 사이로 떨어지는 작은 눈물에 뺨을 가져다 대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일 것이다.
버터가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지 중요하지 않다. 이제 버터는 원래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 그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어떤 과거의 장면이었다. 지난 과거의 수많은 순간,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남겨놓은 여지는 어떤 미래를 만들었을까? 영영 닿지 않을 것들의 이유를 생각해보다가 내가 지나쳐온 여러 장면들을 내 앞에 꺼냈다. 오래전 거기에 두고 온 어떠한 가능성들이다. 도망치듯 떠났던 순간들, 울며 몰래 지나가던 시간들, 손으로 더듬어도 닿지 않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말들의 무덤 위에 눕던 순간들. 누군가와 했던 깊은 약속이라든지 내게만 튼튼하게 보였던 믿음의 고리는 지금 없다. 지나간 어떠한 순간에 내가 끊어냈고, 서로가 끊어 버린 우리들의 약속은 이제 사라졌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사랑, 내 사람이라고 여긴 관계의 우정은 어차피 지금과는 멀리 있다. 이미 닫혀 버린 세계이다.
그렇기에 내 입도 닫혔다. 닫힌 입으로 닫히다 만 말을 하다 결국 닫혀 버린 작은 세상에 있다. 가끔 버터 맛이 나던 남자를 조금 그리워하면서, 그와 닿지 못한 지금이라는 미래를 상상한다. 그러다가 그것이 결국 어떠한 의미도 아니었을 거라며 스스로에게 작은 위로를 보내는 날을 가끔 맞는다.
유럽의 밤이 깊어지는 계절이다. 내가 있는 독일은 북반구에 더 가까워 해의 허리가 한국보다 많이 짧다. 푸른 노을을 따뜻하게 품고 어둠이 땅으로 일찌감치 내려앉는다. 그러면 창문 안에 주황색 전구들이 하나 둘 켜진다. 저녁을 먹고 가끔 구시가지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을 산책을 한다. 거기 있는 사람들의 눈과 귀의 모양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주름의 깊이가 거리가 어두울수록 더 선명해진다. 걷는 동안 길가에 있는 창문 안을 곁눈질한다. 절대 닿지 못하는 타인들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은 가령 이런 것이었다. 이제는 영영 이뤄낼 수 없는 지난 인연들과 걸쳐있던 시간들을 생각하는 일과 닮아 있는 일이었다. 서로는 자신들의 앞에 있는 이의 눈을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가끔 깊은숨 뒤로 어깨를 떨구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 퍼지는 미소를 볼 때에는 영영 이룰 수 없는 미래를 잠시 동안 꿈꿨다.
레스토랑에는 자리가 꽉 찼다. 머리 위 주황색 램프와, 탁자 위 촛불은 그곳을 더 돋보이게 했다.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땋은 여자가 목까지 올라온 검은 스웨터를 입고, 팔꿈치를 대고 한껏 어깨를 구부려 그녀 앞에 있는 사람에게 닿으려 한다. 어디서 왔을까. 잠시 여행을 왔을까, 보고 싶던 친구였을까, 당신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그녀에게 그녀가 모르는 저 창밖에서, 절대로 닿지 않을 목소리로 나의 지난날을 생각해본다. 나는 누구를 잃었고, 누구를 그리워하며, 누구에게 기억되는지, 그리고 어떤 이에게 영영 잊혔을지.
버터 맛이 나고, 혼자 울 줄 아는 남자가 넘기던 책장은 지금 어디쯤 일지, 머리를 땋은 여자의 어깨를 비추는 이 밤의 시간에 그는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지금을 지새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