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옵스큐라
- 사건이 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눈을 위해
마주친다. 빛 뒤로 걸어 내려온 흐린 그림자의 거리였다. 그곳을 온종일 재다가 종이에 기록하는 눈과 마주친다. 하늘이 열려도 해가 나오지 못하는 날의 기록들은 사건이 되지 못했다. 늘 습기가 찼있던 집들의 창문들을 지나쳐 걷는 거리의 발걸음은 언제나 목적이 있었지만 이내 사그라들었다. 어쩔 수 없이 지나칠 수밖에 없던 일들을 기록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던 날들이었다. 사건이 되지 못했던 빛을 종이에 슬프게 그리다가 연필심이 부러졌다. 또한 그림자를 보기 위해 세워 둔 나무 말뚝에 가끔 빛이 와 말뚝 끝에 앉았으나 이내 사라졌다. 그리하여 사라진 순간의 서사를 그리려다 연필심은 또다시 부러졌다. 결국 사건이 되지 못한 오늘의 기억을 위해 나무 말뚝 위에 작은 상자에 구멍을 뚫고 올려 단단히 묶은 후에, 상자 위로 모포를 씌워주었고 모포 안에서 구멍으로 들어올 찰나의 빛의 원근을 옮겨 그리기 위해 계속해서 앉아있어 본다. 카메라 옵스큐라를 생각해 냈다.
상자의 작은 구멍으로 빛이 걸어오고 앉기를, 그 뒤에 긴 그림자를 데려오기를, 짧은 그림자를 밟고 있기를, 기대와 기대들이 단단한 빛의 사슬로 엮여서 그 위를 간절한 바람이 건너오기를.
겨울이 시작되자 고용하지 않은 정원사들이 창밖에 심은 푸른박새의 집을 베었고, 그날부터 창 앞에 커다란 모포를 가져다 놓았다. 지하실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와 창밖으로 향하도록 했고, 안으로 들어갔다. 상자의 구멍으로 올 수 없는 푸른박새의 그림자를 기다렸다. 겨울 동안 창을 단 한 번도 닫지 않았다. 바람은 채도 없이 검은 원근으로만 까맣다고 말했다. 여기서 바람이 멀어지면 까마득한 어둠이었다. 음지로 난 창으로 바람의 육체가 달려올 때마다 부러진 연필심이 생각났다. 그것은 늘 사건이었다.
빛을 관찰하던 일의 고요함 때문에 나의 작은 상자 속에서 나는, 늘 상자 밖의 일이 궁금했으나, 그래서 언제나 사건에 몸을 숙였지만, 지금 창 안으로 들어오던 길 중에 나는, 여기 작은 상자 속에서 내가 나에 대하여.
카메라의 눈 뒤에 서 있는 동안 알게 된 것은 장면이 주는 생경함이었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있기 위해서는 사건은 늘 낯설어야 했다.
낯선,
낯선 숨 아래 흰 서리 밑 얼어붙은 나뭇잎
지난 바람 소리 뒤따라 피는 낯선 붉은 열매
처음 겪는 바람의 나뭇가지 위 낯선 날개
불러주다 잊는 이름을 가진 낯설지 않으나 낯설게 보이는
똑같은 네 생 위 겹겹이 올려진 낯설게 같은 무늬
말로 말할 수 있을 온갖 이름의 무늬
몰라서 낯설기도, 말이라는 이름의 말로 말하다 끝내 낯설어지는 생의 무늬
치욕을 겪을지도 모를 뒷말을 발로 차고도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낯설지 않으려 하다 갑자기 자리를 잊어 낯설어지는 어떤 무늬를 따라가다
어쩌다 내 낯선 손끝에 매달릴 이름들을 부르다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부르다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방관의 무게로 쓸쓸한 장소들을 나열하다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작은 상자가 들어있는 모포를 덮고 나는 오랫동안 여기에 서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건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나 내 세계의 낯선 전체이다. 바람에 모든 것이 날아갈 것을 걱정하여, 정원사들이 버려 사라진 푸른박새의 집 대신에 나의 작은 상자를 꼭 쥐어 잡는다. 그것이 지금의 나의 사건일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