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드라는 아프리카로 갔다
산드라가 이사를 나간 건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삼 층 건물, 맨 꼭대기 옥탑방에 살던 그녀는 제 것 말고도, 내 다리 길이만큼의 척추를 더 가지고 있었다. 경사진 지붕과 그녀의 큰 키로 인해 단 한 번도 샤워를 서서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산드라는 일주일 후 짐을 뺀다고 알려줬다. 나는 언제나 그녀의 인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베를린이 고향이라고 했다. 공동현관 옆이 우리 집 부엌으로부터 난 큰 창이 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나가고 들어오고, 쓰레기를 버리고, 또 남자 친구를 언제 데리고 오는지 소상히 알게 되었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그녀의 사생활이 아니라, 어째서 저 큰 키로 걸을 때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가 였는데, 나무 합판으로 맞댄 계단이라 세탁실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거나 우리 집을 지나갈 때에는 분명 소리가 나야 한다. 나도 그랬고, 이 건물을 들락날락 거리는 이들도 언제나 소란스럽게 쿵쿵대는 것은 생리현상 같은 당연함이었다. 너는 키가 아주커, 그러니까 어떻게든 튀니까 어떻게든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라는 말을 유년시절부터 들었었거나, 걸음걸이를 할 때에는 삐걱 거리는 마루 소리를 내서는 안된다는 예절교육의 유래였을까. 나는 결국 물어보지 못했다.
우리는 가끔 창문으로 입을 뻐끔거리면서 손을 흔들고 얼굴 가득 미소를 보내는 정도였다. 가끔 문 앞에서 서로를 맞닥뜨리면 요즘 어떠냐, 이번 주 출장을 간다, 가면 어디로 가냐, 아프리카로 간다. 산드라는 외국인을 위한 비영리 단체를 관리하는 정부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담당은 아프리카였다. 집주인의 걸음 소리 대신 정적을 깨는 이는 산드라의 연인이었다. 언젠가 한 번 흑인이 공동현관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라면을 먹다가 놀라서 누군가 싶어 계속 쳐다봤는데 그가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내 머리 위로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삼층에 가 닿았다. 산드라의 손님이었다. 난 왜 놀랐을까. 한 번도 본 적 없던 얼굴이, 아니면 이 동네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흑인이 아무 연고 없는 우리 집 앞에 왜 서 있었을까 그것이 궁금해서 그랬었을까
코피라고 했다. 발음이 조금 우리말의 '코피' 같아서 나는 그냥 스스로 그를 코비라고 부르기로 했다. 눈 밑이 까뭇했다. 그는 연인의 집에서 자주 머물렀다. 삼 주에 한 번은 꼭 왔는데, 마치 출장 간 남편이 돌아오는 것 같이 보였다. 한 번은 그가 너무 오랫동안 산드라의 집 초인종을 눌렀는데 인기척이 없는지 문이 열리지 않아 내 부엌 창문 앞에 오래도록 서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도 라면을 급하게 먹고 있었는데, 식사 시간을 방해받지 않으려고 그에게 문을 대신 열어주었다. 산드라는 욕실에서 쭈그리고 목욕을 하느라 초인종 소리를 못 들었단다. 소리보다 낮은 천장의 무게가 더 신경 쓰였으니 그럴법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가 오는 날이면 송곳니를 보이면서까지 친하게 굴었다. 마치 내 집에 오는 손님 같이 반겨줬다. 한 달 동안 산드라는 집을 비운 적도 많았다. 우간다와 콩고 등 아프리카의 중남부 도시들을 출장으로 자주 갔다. 돌아오고 나면 언제나 정말 아름다웠어, 정말 좋았어 라고 항상 말했다. 거기가 정말 좋았어 그랬어? 되물었고, 그럴 때마다 그녀의 입꼬리는 눈가에 닿았다. 아름다운 장면을 많이 두고 왔나 보다. 거기, 아프리카에.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가 터졌다. 그녀는 부모가 있는 베를린으로 가 홈오피스를 한다고 했다. 그 이후 도시 간 이동이 금지되면서 몇 달간 그녀의 옥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트렁크 몇 개를 차에 싣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짐베-아프리카 드럼- 가지고 내려왔다. 그리고 내게 검지와 중지를 꼬아 보이며 신의 가호를 빌자고 했다. 나는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더더욱 잊었고, 다행히 신의 가호가 돌보아 준 덕분에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은 늘 섧다. 준비하지 못한 헤어짐은 더 그렇고, 이제 막 친해지려고 하는 사이에는 더 그렇다. 베를린 한 곳에서만 칠천여 명이 코로나에 감염되어 온통 패닉이었던 그 봄날 동안, 산드라는 어떻든 잘 살아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여름의 초입에 다시 만나 이별의 소식을 들었다. 우간다로 간다고 했다. 주말에 코비가 트럭을 빌려온단다. 처음으로 삼층 구경을 했다. 초여름이었는데도 너무 더웠고 욕실 천장은 너무 낮았다. 모든 무거운 가구는 두고 간다고. 건물 주인이 두고 가면 자신들이 갖겠다고, 이러이러한 것들이 남아 있다고 너 관심 있냐고, 그러면 내게 주고 싶다고. 그래서 나는 알래스카라는 상표의 스탠드형 선풍기와 플라스틱 박스 몇 개, 바퀴가 달린 이동식 선반 같은 것을 받았다. 문 앞에 있는 다 말라가는 식물들도 들고 왔다. 산드라는 그중 행운목만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남은 이름 모를, 물만 주면 계속 자라는 초록 식물들도 들고 내려왔다.
코비가 주말에 약속대로 왔다. 우리가 도와주겠다고. 삼 층은 너무 높았다. 짐을 가지고 오르락내리락하기에는 계단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나와 남편은 산드라의 의사와 트렁크 몇 개, 램프들, 세간들을 옮겼다. 꽤 무게와 부피가 나가는 세간은 그녀가 분명 아끼는 것일 거라 믿었다. 그래서 여기에 두고 가지 않는 것일 거다. 짐을 빼는 날 하필이면 집주인은 여행을 갔다. 주인의 아들 부부가 사는 2층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열쇠만 받았다. 계단 위로 노크 소리와 잘 지내라고, 성공을 빈다는 틀에 박힌 대화가 오갔다. 같은 독일 사람인데 짐을 옮기는데 내다보지도 않는 게 괜히 미웠다. 앞 집 노부부는 창문에 코를 붙이고 그녀가 떠날 때까지 지켜봤다.
아프리카를 가지 않은 내가 물을 수 있는 질문은 별로 없었다.
산드라 너 거기에서 잘 살 수 있겠어 거기는 사람 살기 괜찮니 도대체 거기는 왜 하필이면 가는 거야 여기서도 사람들이 코로나로 죽어 나가는데 왜 굳이 이 시기에 거기로 가니 너는.
이삿짐을 빼러 코비가 온 날에도 나는 그에게 거기 괜찮냐, 라는 말을 또다시 물었다. 역시나 해맑게, 그럼 당연히 괜찮지. 몇 초 간의 정적을 나는 밟으면서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서툰 상상들이 타인의 그것과는 영영 다르다는 점에 조금 쓸쓸해졌다. 우간다는 코비의 고향이라고 했다. 거기서는 코비가 직장을 구하기가 더 좋다고도 했다. 자기들에게 더 잘된 일이라고.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우간다는 여전히 아름답기 때문이라 했다. 여전히 가 보지 않은 곳에 대해 상상한 문장을 넣어 질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녀 문장의 마침표에는 새로운 장소에서의 시작을 기대하는 평범한 설렘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곳이 얼마나 아름답냐는 물음을 나는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전날 마트에서 고속도로에서 조금 먹을 만한 물이라든지, 주전부리와 인사동에서 사 와 기념품으로 친구가 생기면 주겠다고 보관해 둔 지갑에 10유로와 -네 미래에 축복을-이라는 독일어 문장을 넣어 편지를 써넣었다. 코로나 때문에 서로 포옹하지 못했다. 대신 팔꿈치를 부딪히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산드라는 마지막으로 내게 어떤 CD 음반을 주었다. 어머나 코비는 뮤지션이었다. 마지막에서야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되었으니 그제야 우리는 처음 만났다.
찌던 여름이 지나고 벌써 겨울이다. 선풍기는 괜히 받았나 싶었다. 집 정리를 하다가 산드라의 화초에 오랜만에 물을 주었다. 코비의 시디를 틀었다. 산드라가 조용히 제 옥탑방으로 걸어 올라가는 것 같다. 코비도 곧 공동현관 앞에서 막 초인종을 누를 테지.
아프리카도 지금쯤이면 겨울이니
산드라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니 코비도 잘 있니
다 괜찮니
네 말대로 거기는 여전히 아름답니
네게도 신의 가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