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방 문 뒤로 까만 세계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시립 도서관에서 창작 수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제까지 절대 보지 못한 아이를 보았다. 나중에 정말이지 대단한 작가가 될 거라는 직감을 받았고 그것은 그 아이의 미래에 대한 확신의 믿음이었다. 적어도 분명히 그 아이는 미래에 무언가를 쓰고 있을 거라고. 그리고 나는 그것이 틀리지 않다 여긴다. 지금까지. 아이의 한 문장이 십 년째 펜 끝에 매달려 있다. <엄마가 방 안에 있었고, 다른 남자도 있었다. 나는 집을 나갔고 죽고 싶었다>
온통 불안이 가득한 어둠이었다. 무엇이었을까. 세계의 절망을 훔쳐보고 맞는 매서운 바람이 때리는 뺨이 아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 이후로도 아이는 자신을 버림받은 딸이라고 글 곳곳에 숨겨두었다. 숨기지 않고 썼다. 그리고는 내게 엄마에게는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네 속 마음의 이야기"를 쓰면 된다는 선생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렸나 보다. 아니면 그 아이에게는 진심을 터 놓을 다른 어른이 절실히 필요했던 걸까. 글 아래 작은 그림을 그려도 된다고 하자 동갑내기 다른 아이들은 가져온 온갖 알록달록 필기도구로 무지개를 그리고, 강아지를 그리고, 집을 그렸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나머지 자리를 가득 오로지 연필만으로 색칠했다.
매 수업이 끝나면 아이의 엄마는 늘 피드백을 필요로 했다. 헌신적인 어머니였다. 내게 아이의 글투가 어떻냐 재능은 있냐 궁금해했다. 어느 날 아이가 나를 개인교사로 두고 싶다고 내 의중을 물었다. 난 그 당시 여러 사정이 있어 정중히 거절했는데 아무래도 잘한 것 같았다. 어떤 경험을 하든 자기의 경험의 축적이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밝지만은 않을 어떤 경우라면 그것이 과연 필수적으로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펀지 같을 나이의 유년시기에 알게 될 것들이 자신의 세계를 산산조각 내는 계기가 된다면 어른으로서 나는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데미안>에서 알을 깨고 나아가야 한다는 그 유명한 세계가 그 시절의 아이들에게 얼마나 현실 인지. 그들이 언젠가 목격할 "어느 날 방 문을 열어 보게 될 까만 세계"의 무게의 경중을 따지는 일은 사실 쉽지 않다. 그때 기록하고 기록되는 '사실'이라는 요소는 소설에서 쓰이는 '주관적 사실' 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 펜 끝에 매달린 그 아이의 문장들이 가끔은 진실일 수도, 혹은 가공된 진실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시절의 엄마에게로 향하는 미움의 논리에 어떠한 도덕적 요소의 수치를 가미한 문장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거기엔 눈으로 본 것만 그대로 옮긴 장면만 있을까, 사실적 요소가 단 한 군데도 없이 온전한 픽션일까
하지만 내게 좀 더 중요했던 것은 이것이었다. 그 아이의 여러 문장들 중 닫힌 방 문 뒤로 들어가 맞딱들였을 그 아이의 한 시절보다 이것이 자기 글이라며 내게 들이밀던 종이를 들고 있던 손에 꽉 움켜 쥔 용기였다. 나는 그것은 분명 진실이었다고 믿는다. 닫힌 방의 문을 열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그러한 문장과 비슷한 결을 갖는 문장조차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까만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제 눈 앞에 있는 절망을 위로해주지 못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장을 들이밀던 아이에게 그때의 내가 해줄 수 있었던 것은 공감이었다. 그저 믿어 주는 것이 필요한 나이였다. 지금쯤이면 그 아이는 스무 살이 되었겠다. 어떻게 컸을까.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미래에 어떤 이로 남고 싶어 했을까. 결국 그 아이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