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 모범, 자율, 지도'의 뜻에 대하여
최근 베스트셀러인 <90년생이 온다>를 읽었다. 밀레니얼 세대의 이야기다. 80년대생까지 밀레니얼 세대라 부르기도 한다는데, 작가는 80년대생과 90년대생은 다르다고 말한다. 실제로 80년대생인 선배와 친구들을 만나면 ‘우린 밀레니얼 세대가 아니야. 그냥 끼인세대지.’라는 말을 한다.
책을 읽다가 ‘버릇없는 젊은 놈들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라는 소제목에 눈길이 갔다. 동시에 사관학교 1학년 생활이 떠올랐다. 선배들은 매년 신기하게도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한다. '올해 1학년들은 이렇게 문제가 많지?'라고. 요즘 유행하는 '라떼는 말이야...처럼, 우리 때는 저렇지 않았는데'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90년생이 온다>에서도 이에 관한 글이 있다. 아니, 테스 형도 그랬단 말인가.
"요즘 젊은 놈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은 아마도 인류가 절망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4000년 전 바빌로니아 점토판 문자를 비롯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등장하니 말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도 “고대의 장수들은 혼자서 가뿐히 돌을 들어 적에게 던졌지만, 요즘 젊은이들 같으면 두 명이서도 들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다”라는 표현이 쉬지 않고 나온다. 소크라테스도 “젊은이들은 아무 데서나 먹을 것을 씹고 다니며, 버릇이 없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90년생이 온다, 66쪽>
‘복종, 모범, 자율, 지도’ 이 네 가지 단어가 무엇을 뜻할까? 일상에서 듣기 쉬운 말은 아니다. 정겨운 말은 더욱더 아니다. 잠시만 글 읽기를 멈추고 생각해보길 권한다. 무슨 뜻일까?
첫 단어부터 심상치 않은 이 네 가지 단어는 사관학교 각 학년의 생활 모토이다. 응? 뭐라고? 문화적 충격을 받을 수도 있지만, 직접 몸으로 겪어보면 생각보다 충격이 크지 않다. 사실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도 거의 없다.(지금도 이 네 가지 모토가 사관학교에 여전히 존재하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공사의 경우 1학년부터 4학년까지 한 개의 층에서 함께 생활을 한다. 사관학교 생도대(기숙사)는 크게 두 개로( 1대대와 2대대) 구분되고, 각 대대는 또 4개의 중대로 구성이 된다. 각 중대는 다시 4개의 편대로 나누어진다. 편대의 개념은 비행과 관련이 있다.
편대비행 : 공군의 경우 2기 이상의 항공기가 일정한 거리와 간격을 유지하면서 비행을 하는데 이를 편대 비행이라고 부른다.
생도대는 어두운 저녁의 학교 복도처럼 길다. 교실처럼 길게 이어진 복도 양쪽으로 생도들의 방이 있다. 한 방에 학년별로 2명씩 함께 생활을 하는데, 각 방 앞에는 그 방을 사용하는 2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 이름 위에 1~4학년 표시 대신에 복종, 모범, 자율, 지도라는 네 단어가 파란색 바탕에 빛나는 은색 글씨로 적혀있다.
각 학년의 모토에 맞게 사관학교 생활이 펼쳐진다. '복종'이라는 부담스러운 단어는 어디에서나 1학년들을 따라다닌다. 식사를 하러 갈 때도, 달리기를 할 때도, 청소를 할 때도 심지어는 잠을 잘 때도 1학년에게는 '그 단어'가 함께 한다. 모토에 맞게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시간들로 채워진다. 자유시간은 거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무언가 하느라고 바쁘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삶이다.
2학년이 되면 ‘모범’이라는 푯말로 바뀐다. 여전히 후배보다는 선배들이 더 많아서 눈치는 보인다. 그래도 1학년 후배들이 있으니, 선배로서 모범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1학년이 잘못하면 오히려 2학년이 혼나기도 한다. 선배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끼인 학년이다. 마치 요즘 80년 대생들과 같이.
3학년은 ‘자율’이다. 생도생활에 여유가 생긴다. 1학년을 교육하는 역할도 주어진다. 3학년 때가 사관학교 생활에서 황금 같은 시기이다. 일단 후배들이 선배들보다 많다. 선배들은 3년을 함께 살았기 때문에 이제 친하다. 웬만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는다. 중대장, 훈육관들은 4학년을 집중 마크하기도 바쁘다. 자연스럽게 3학년은 모든 분야에서 중심이 된다.
4학년은 ‘지도’인데, 이제 졸업 후 장교로 임관 후 생활을 준비한다. 비행 훈련도 받기 시작하고, 지휘법과 리더십에 대한 수업도 받는다. 선배들이 없어서 혼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중대장과 훈육관들의 집중 관심 대상이 된다. 오히려 이 분들의 관심이 더 부담스럽다.
<슬램덩크>와 비교해서 생각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농구부 1학년은 드리블 기초 연습에 각종 청소와 허드렛일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강백호, 서태웅, 전호장 같은 1학년들은 예외다. 이들이 바로 90년생 같은 존재다. 자신의 주장을 명확하게 내세우고 집단의 생활보다는 개인의 생활을 중요시한다. 그러면 기득권 집단인 선배들과 충돌이 일어난다.
2학년은 송태섭, 윤대협, 정우성을 떠올리면 된다. 사관학교로 치면 2, 3학년을 합쳐놓은 것과 비슷하다. 이들은 태도에 여유가 있고 생활도 자유롭다. 실력도 어느 정도 갖추었고, 선배들과 잘 지낸다. 물론 가끔은 선배들과의 의견 충돌이 있기도 한다. 송태섭과 정대만처럼.
3학년은 채치수, 안경 선배, 안정환을 떠올리면 쉽다. 나이 차이는 1~2살 정도지만, 태도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리더의 모습이 보이고, 팀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도 많다. 이렇게 비교해보니 더욱 비슷하게 느껴진다.
다시 <90년생이 온다>로 돌아가 보자. 이 책에서는 90년대생의 특징을 '간단하거나, 재미있거나, 정직하거나.'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칼퇴근, 회식은 싫다, 휴가는 내 마음대로처럼으로 표현한다.
사관학교 1학년들과 90년생은 묘하게 비슷하다. 집단생활은 해보지 않아서 어리버리하고, 함께보다는 개인이 편하다. 전통과 역사는 이해하기도 싫다. 사실 '버릇없다'는 이야기는 아직 이 조직에 적응되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일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박주경 작가님의 첫 번째 책 <따뜻한 냉정>의 첫 번째 글도 꼰대에 대한 내용이다. 기성세대를 비판함과 동시에 청년세대에게도 당부를 잊지 않는다.
회식도 꼰대도 사절합니다.
무엇이든, 상대가 원치 않는 걸 강제로 시킨다면 요즘 시대에 정당한 일로 용인받기 힘들다. 그 무슨 재미있는 행위라 해도 당사자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소용없는 법이다. 심지어 '재미도 없는' 일을 '내키지 않아 하는' 사람에게 시킨다면 그건 최악이다.
그런데 가끔 반전도 있다. 기성세대의 꼰대질·갑질을 그토록 가차 없이 비판하던 청년세대가 종종 그 이상의 꼰대질·갑질을 보여주는 경우다.(중략) 그걸 그대로 답습하면서 남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내로남불'이라 했던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 청년세대라고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90년생과 1학년들이 사회와 조직에 빨리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슬램덩크에서 답을 찾아보았다. 문제아인 강백호, 개인주의자 서태웅, 다혈질 송태섭, 싸움꾼 정대만 이 '문제아 군단'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생각해보자. 그건 '허허허' 웃으면서 모두를 품어주시는 안선생님과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차갑지만 팀의 흔들리지 않는 주장인 채치수 그리고 언제나 따뜻하게 후배들을 감싸주는 안경 선배가 있다.
무엇보다도 ‘승리를 위한 공통된 목표’가 있다. 직장생활도 농구도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 집단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를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복종, 모범, 자율, 지도' 이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단어들이 우리의 이름 위에 올려져 있었지만, 그 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각자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90년생에게도 조직생활의 '비전'과 약간의 '이해'가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요즘 젊은 놈들은 버릇이 없다."를 말하기 전에 "함께할 수 있음에 고맙다." 또는 "네가 최고다."라고 말을 해주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