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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천일은 어땠나요?

육아, 연애, 공부 그리고 생도생활 이야기

by 송곳독서

천일, 3년에서 조금 부족한 시간. 그 소중한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다.

배경음악은 이승환의 <천일동안>

그 천일동안 알고 있었나요
많이 웃고 또 많이 울던 당신을 항상
지켜주던 감사해하던 너무 사랑했던 나를.


출근을 하면서 이 노래를 무한 반복해서 들었다. 글감이 생각나기를 바라면서, 기억을 추억하면서 말이다. 천일이라는 시간이 주는 의미는 크다. 습관을 만드는데 필요하다는 100일보다 10배나 많고, 만 3년에 정확히 95일 부족한 시간이다. 천이라는 숫자는 영원을 뜻한다. 실제로 ‘천겁’은 오랜 세월, 영겁의 세월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천일'이라는 시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삶은 영원하지 못할지라도 그 마음만은 영원할 수 있도록.


각자의 천일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어떤 사람과 특정한 경험의 천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하루하루를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다. 반대로 너무 힘들어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을 때도 하루씩 시간을 세어보기도 한다. 느낌은 정반대지만, 둘 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이라는 것은 같다.


내가 기억하는 천일의 추억들.(생후 1000일)

태어난 후 천일 동안의 날들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부모님이 찍어주신 사진을 가지고 그때를 상상한다. 머릿속 어딘가에 그 기억이 남아있다면 잠시만 떠올라주면 좋으련만. 새로운 세상이란 곳에서 무려 천일을 향해가고 있던 4살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태어나던 그때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들이 태어나던 그때는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울지도 않고 입으로 방긋방긋 숨을 쉬면서 나를 처음 바라보던 그때를 말이다. 그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서 동영상 촬영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순간에 잊지 않고 카메라를 꺼낸 나를 칭찬한다. 나중에 아들에게 꼭 보여줄 테다.


아들이 태어나고 백일 동안은 날마다 사진을 찍어서 성장하는 모습을 기억했다. 눈으로 바라보는 아들은 같아 보였지만, 사진으로 보이는 하루하루는 조금씩 달랐다. 빨리 자라서 천일을 맞이할 때를 기다렸지만, 지금은 다시 그 시절이 그립다. 이제는 날짜를 세지 않는 시기가 왔다. 여전히 소중한 날들이지만 천일이 넘는 시간을 세어보진 않는다. 대신 가끔 날짜 계산기를 돌려본다.


연애&결혼 천일

천일을 처음으로 세어본 것은 연애할 시기이다. 연애를 할 때는 사귄 지 며칠이 되었는지를 정확히! 기억하느냐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사귄 지 얼마나 되었어?"라고 물을 때 꼬박꼬박 "000일 되었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유치하지만, 사랑은 많은 유치한 것들을 용납하게 해 준다. 결혼 천일은 연애할 때보다 훨씬 빠르게 흘렀다. 삶에서 가장 여유롭던 시간들이다. 맛집을 찾아다녔고, 마음만 먹으면 여행을 갈 수 있었다. 천일 기념으로 떠났던 유럽여행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공부하면서 천일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푸념한다. 나이 숫자만큼의 속도로 세월이 흐른다고 하는데, 이 또한 세월이 지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을 때 생긴다. 아침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프랭클린 플래너를 쓰는 일이다. 오늘 아침에는 E 965, R 833, P 239, T 177이라는 숫자를 적었다. 알파벳과 숫자가 뜻이 궁금하지 않은가? 아니었다면 미리 죄송하다. ‘E(english) 영어, R(reading) 독서, P(project) 아침형 인간, T(try) 도전’을 뜻한다. 옆에 적혀있는 숫자는 진행 날짜이고, 독서의 경우 지금까지 읽은 책의 권수이다. 영어의 경우 이제 천일을 향해간다. 독서도 천권을 향하고 있다. 아침 프로젝트와 도전(글쓰기)은 아직도 나아갈 길이 멀다. 천일의 시간이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글쓰기도 앞으로 823일이 지나면 잘하겠지?


마지막으로 생도생활 천일

이 말을 하기 위해서 돌고 돌아서 왔다. 공사 생도대에는 명예 광장이라고 불리는 광장이 있다. 활주로를 형상화한 상징적인 곳이다. 이곳에선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진다. 아침마다 점호는 기본이고, 주말 외출을 나가기 전과 후에도 이 곳에 전체 생도가 모여서 인원 파악을 한다. 즐거운 일도 힘든 일도 벌어지는 곳이다. 애환이 담긴 곳.


1학년 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 3학년 선배들은 사관학교 입교 천일을 맞이했다. 그날도 어느 때와 같이 모든 생도가 모여서 엄숙한 가운데 저녁 점호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전대장생도(학생회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가 단상 위로 뚜벅뚜벅 걸어 나와 그 엄숙함을 깨고 <천일동안> 노래의 한 구절을 불렀다. “그 천일동안~”이라는 목소리가 어둠과 정적을 타고 멀리 퍼져나갔다. “3학년들, 천일을 축하한다.”라는 말이 이어졌다. 그 순간 3학년 선배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나도 모를 전율이 흘렀다.


오히려 내가 3학년이 되어 천일을 맞이했을 때보다 1학년 때 선배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기억에 더 뚜렷하게 남아있다. 부러움 때문이었을까. 시간이 흘러 3학년이 되어 천일을 맞이했을 때는 오히려 더 담담했다. 크게만 느껴졌던 선배들의 모습과는 달리 우리는 그리고 나는 여전히 부족함이 많았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의 시간들은 하루하루는 힘들었지만, 전체로 보면 물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흘렀다.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다. 노래의 ‘천일이 훨씬 지난 후에라도 역시 그럴 테죠’라는 가사처럼 천일이 지난다고 해서 삶이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또다시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하고 다시 꿈을 향해서 나아가야만 한다. 지금까지 천일을 숫자로 세면서 간절하게 지내왔다면 지금부터는 그 기억으로 또 다른 천일을 세어나가야 한다.


힘들었다면 과거를 잊어버리고, 좋았다면 기억하면서 새로운 삶의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가야 한다. 오늘이 다시 돌아오진 않을 테니까.


그 천일동안 힘들었었나요
혹시 내가 당신을 아프게 했었나요
용서해요 그랬다면 마지막일 거니까요

난 자유롭죠 그날 이후로 다만
그냥 당신이 궁금할 뿐이죠
다음 세상에서라도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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