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지 않고 2시간 서있는 방법에 대해
오늘의 배경음악은 2곡이다.
시작하는 음악은 영화 클래식의 OST 한성민의 <사랑하면 할수록>
첫사랑인 그녀와 함께 보았던 영화다.
영화를 보면서 사연 있는 남자처럼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가득했다고 어머니는 말하셨다. 몇 살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기공룡 둘리를 보다가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아무튼 영화를 보다가 혼자서 잘 운다. 이것도 유전인지 아들도 슬픈 책을 읽어주면 울먹울먹 하면서 듣고 있다.
영화가 2003년에 개봉했으니, 벌써 17년이 되어간다. 오래전에 개봉한 영화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내냐고 묻겠지만, 기억은 그렇게 갑자기 떠오른다. 영화에서는 여전히 잘 나가는 세 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조승우, 손예진 그리고 조인성. 세 명의 배우 모두 80년 대생들이다. 나와 비슷한 나이 대의 배우들이 내가 대학생활을 시작할 때(물론 사관학교였지만), 대학생활의 낭만과 사랑을 그린 영화였기 때문에 더 마음속에 특별하게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3년 전에 우연히 EBS 한국 영화 특선에서 <클래식>을 상영했다. 처음에는 추억을 생각하면서 잠시만 볼까 하고 앉았다가 끝날 때까지 봤다. 영화가 끝나니 월요일 새벽 2시였다. 영화를 보면서 결말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다들 그런 기억이 있지 않을까? 분명 결말을 아는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는. 놀랍게도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준하(조승우)와 주희(손예진)를 만나는 장면을 잊고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10여 년 전 그때처럼 또 울었다. 이 영화는 왜 이렇게 나를 울리는 것일까.
이번 주에 글을 쓰면서 영화를 세 번째 보았다. 이번엔 결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난번 브런치 글에 적었던 <당신의 인생 책은 무엇입니까?>라는 글에서 책을 3번 이상 읽으면 인생 책이라고 했는데, 영화도 3번 이상 보면 인생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나의 인생영화 리스트에 올리면서 글을 시작한다.
영화를 시작하는 대사는 이렇다.
“옛날 어린 시절에 강 위에 떠 있던 커다란 무지개를 본 적이 있다.”
혹시나 영화를 다시 볼 생각이라면 이 대사를 기억하고 영화를 보자. 복선의 대사다.
딸인 지혜(손예진, 1인 2역)는 엄마(주희)가 여행을 떠난 사이에 집 정리를 하다가 엄마와 아빠(태수, 이기우)가 어린 시절 주고받았던 편지함을 열어보게 된다. 그러다가 아빠인 태수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준하(조승우). 그리고 일기장 한 권을 발견하는데, 바로 준하의 일기장이다. 준하가 죽으면서 주희에게 전달된 마지막 유품. 그 일기장에 있는 사진으로 화면이 전환되면서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창가에 앉아 있는 준하의 모습으로 화면이 전환되는 모습은 너무나 일본 영화 <러브레터>를 닮았다. 다음엔 <러브레터>를 봐야 할까.
준하와 주희의 사랑(1960~70년대) : 순수함
첫 등장은 가난한 준하와 부잣집 아들 태수가 등장한다. 둘은 절친한 친구가 되지만, 그게 비극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태수는 준하를 처음 만나서 약혼녀에게 보낼 편지를 적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서 주희 사진을 보여주는데, 준하가 방학 동안에 소설 <소나기>의 한 장면을 찍었던 그 소녀 주희(손예진)다. 방학 동안에 할아버지 집에 잠시 내려왔다는 <소나기>의 설정을 그대로 따른다.
둘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폐가 구경을 간다. 마침 소나기를 만나 오두막에서 비를 잠시 피한 다음 수박 서리를 해서 맛있는 수박을 먹는다. 돌아가는 길에 다리를 다친 주희를 업고, 늦음 밤이 되어 반딧불이도 잡는다. 하루 동안의 신세를 진 주희는 자신의 소중한 목걸이를 준하에게 선물을 주고 떠난다.
그 주희를 태수 덕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상민과 지혜의 사랑(2000년대) : 솔직함
현재의 지혜는 상민오빠(조인성)를 좋아하지만, 표현을 하지 못하고 친구인 수경의 데이트 들러리만 설뿐이다. 보고 있으면 그냥 답답하다. 상민오빠는 그런 지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뜬금없이 선물을 두 개 샀다면서 지혜에게도 하나 고르라고 한다. 전형적인 어장관리 스타일이다. 그 선물함 속에 이런 문장이 적혀있었다.
태양이 바다에 미광을 비추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희미한 달빛이 샘물 위에 떠오르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아주 유명한 작가의 글일 것 같아서 찾아보니 무려 '괴테'의 시다. 이 글도 역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복선 역할을 한다.
다시 준하와 주희의 사랑(1960~70년대) : 포크댄스, 가난 그리고 이별
주희와 준하는 태수 덕분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순수한 만남을 이어가지만 오래갈 수 없는 사랑이다. 준하의 마음을 모르는 태수는 더 적극적으로 주희에게 다가가고, 양쪽 집안에서도 이미 둘을 약혼자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 지친 주희는 준하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쩔 수 없어.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니. 더 가슴이 미어 온다. 이 말과 동시에 주희는 준하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첫 번째 위기. 하지만 준하는 학교 앞, 집 앞에서 비를 맞으면서 기다리고, 감전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가로등 불을 켰다 끄는 노력을 통해 겨우 주희의 마음을 돌린다. 하지만 몰래한 둘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태수와 주희의 부모에게 들키게 된다. 둘의 관계를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태수는 아버지에게 심한 매질을 당한 후 자살을 기도한다. 친구의 자살기도와 현실의 벽에 부딪힌 준하는 군에 입대를 하고, 얼마 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다. 그렇게 둘은 아주 멀어진다.
상민과 지혜의 사랑(2000년대) : 모두가 아는 그 장면
갑자기 비가 내리고 상민은 자연스럽게 비를 피해있는 지혜에게 다가온다. 도서관에 간다는 지혜를 굳이 우산도 없는 상민은 재킷을 벗어서 비를 막아주겠다고 한다. 고어텍스도 아닌 그냥 면 재킷으로 말이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그 장면이 탄생한다. 얼마 뒤 지혜는 상민이 우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우산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일부러 우산을 매점에 두고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상민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결론은... 여러분이 아는 그 내용이다.
사실 나에게 영화에게 기억에 남는 장면을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키가 큰 태수가 운동장에서 조회를 하다가 픽 쓰러지는 장면. 바로 이 장면이다. 왜 그 많은 장면 중에 이 장면일까? 뭐 궁금하지 않으셔도 조금만 더 읽어주시길.
사관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퍼레이드’라는 것을 한다. 커다란 연병장에 전 생도들이 모여서 단체로 줄을 맞추어(열과 오) 행진하는 것을 하는데,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 동작으로 움직여야 한다. 사실 행진하는 것보다 더 힘겨운 것은 가만히 서서 대기하는 시간이다. 대통령이 오시는 졸업식 때는 2시간 정도를 움직이지 않고 서있어야만 한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인데, 사진에 보이는 저 푸르고 하얀 옷은 단 한 벌뿐이다. 다시 말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똑같은 옷을 입고 서 있어야 한다. 봄과 가을은 문제가 없지만, 여름과 겨울은 힘들다.
1학년 때 잔뜩 긴장을 하고 있던 나는, 서서 대기하고 있던 중에 영화에서의 태수처럼 픽하고 쓰러졌다. 그때 깨달았다. 쓰러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약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지고 세상이 살짝 노랗게 보이면 쓰러질 수 있다는 징조다. 절대 여름에는 푸릇푸릇한, 겨울에는 노오란 잔디를 바라보고 있으면 안 된다. 잔디를 보고 있으면 잔디가 다가온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거나 앞에 있는 건물을 보는 것이 좋다. 그 노하우를 모르던 새내기 1학년은 잔디가 얼굴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쓰러졌다. 신기하게도 쓰러질 때 아프지는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잠시 후에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과 몸에는 잔디를 붙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뿐.
일상생활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혹시나 움직이지 않고 오래 서있을 기회가(?) 있는 분들을 위해 쓰러지지 않고 오래 서있는 방법에 대해서 간단히 적어보려고 한다.
준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중간에 화장실을 갈 수는 없으니 반드시 미리 다녀온다. 날씨에 따라서 안에 껴입는 옷들은 조금 달라진다. 가능하다면 답답하고 두꺼운 옷보다는 살짝 선선한 얇은 옷을 입는 것이 좋다. 야외라면 선크림은 필수다. 하얗게 바르자. 아! 모자는 절대 이마를 압박해서는 안된다. 딱 맞는 모자보다는 살짝 여유 있는 모자가 좋다.
실전
연병장에 도착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주변을 살펴본다. 관람석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만 보고 있는 것도 좋다. 이때는 몰랐지만, 사실 사색하기에 아주 좋은 시간이다. 생각거리를 가져가서 혼자 머릿속에 이리저리 굴려본다. 하지만 시간은 더디게 간다. 한참을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귀빈석 사람들도 다 오지 않은 듯하다. 그럴 때는 옆사람과 이야기를 한다. 3, 4학년들은 소곤소곤 자유롭게 이야기하지만, 1, 2학년들은 조금 눈치가 보인다. 그러니 선배들이 말을 많이 하자.
말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 거려보자. 눈도 좀 굴리고 뇌도 굴려보자. 심호흡도 좋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자. 의식적을 복식호흡을 하면 좋다.
위기
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찌해야 할까? 이때 필요한 건 자신감이다. 일단 잠시 모자를 벗어서 피가 통하게 한다. 용기가 조금 필요하긴 하다. 그래도 쓰러지는 것보다 낫다. 모자를 벗었는데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서 행사장을 빠져나가자. 이때 핵심은 뛰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부탁
기념사는 짧고 간결하게 가능하다면 재미도 좀... 부탁드립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내가 준하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가장 쉬운 것이 포기하고 회피하는 것이다. 포기부터 하진 말자. 바꿀 수 없는 현실도 있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해보고 후회하는 것과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는 것은 다르다. 베트남 전쟁에서 주희가 준 목걸이를 찾는 용기로 현실과 부딪혀 싸워보라고 말하고 싶다. 후회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그래서 끝나는 음악은 넥스트의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