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만 걸어요.
꽃길만 걸을 거야. 꽃길은 말이야.
사실 비포장도로야.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데, 죽을 수도 있다.
- 멜로가 체질
인지치료를 받고 있는 친구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바로 힘들었던 순간에 대한 기억들, 감정들을 낱낱이 기록해서 가져가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상담을 펑크 낸 적도 있다고 한다. 비슷하게 겪었던 일이라 생각만 해도 진이 빠진다. 하지만 필요한 것들이겠지.
구독 중인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이 우울증에 좋다고 알려진 방법들이 환자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영화나 드라마 시청을 권했다. 픽션이지만 위기를 극복하고 어떤 식으로든 해소되는 경험을 간접적으로 하다 보면 내면의 에너지가 회복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에너지가 너무 없을 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말의 긍정적인 노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다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보기 시작했다).
요즘은 나한테 질문을 참 많이 한다. 살면서 가장 많은 질문을 하고 있다. 그동안도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해결하려고 했지만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나에게 던진 질문들이 과연 '내가' 던졌던 질문일까? 누군가,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현시대에 맞는 인간상을 나도 모르게 체화해서 내게 요구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려고 했을까. 그 열심히 '해야 하는'(내가 정했다고 믿어온) 것들은 누가 정했으며 내가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존감을 방어하기 위해 나는 어떤 것들을 장치로 사용하고 있는 걸까.
죽을 것 같다.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자마자 모든 게 다시 가라앉고 있다. 불안해지고 숨을 쉬기 힘든 답답함이 몰려오면 다시 원점에 서있는 나를 발견한다. 거기서부터 모든 게 시작됐다고 생각해서일까. 수십 번이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다음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했는데. 문을 열고 보면 여전히 익숙한 풍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독여본다. 언젠가는 저 문 밖으로 나가볼 수 있겠지. 아침이 오겠지. 죽을힘을 다해 어서 나아지겠다는, 그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시간을 들여 날 들여다보는 것. '진짜' 내 생각이 뭔지 살피고 알아채려고 노력하고 들어주는 게 다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되도록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는 것.
일을 시작하려는 이유는 나를 더 알고 싶어서이다. 예전처럼 그럴듯한 아웃풋, 성과, 실적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다. 그럴수록 신기하게 내 눈앞의 일에 대한 생각이 명료해진다. 우울증의 늪에서 허우적댈 때 울면서 꾸역꾸역 일했던 그때의 경험은 여전히 두렵지만, 다시 시도해보고 싶다. 우울증 때문에 일하기가 힘들었던 건지, 내 안의 목소리를 묵살하며 참고 일한 덕분에 우울증이 심해진 건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소름 끼치도록 두렵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에 대한 정보는 많아지지만 그걸 처리하는 스스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때 꽃길은 저승길이 될 수 있다.
다시 도돌이표다. 다 때려치우고 전혀 다른 곳으로 가야지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게 해답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도망치면 영원히, 언제고, 매번, 수도 없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도망치지 않겠다. 여기서부터 시작해 움직일 작정이다. 내려다보면 변함없는 같은 점으로 보이지만 분명 뱅글뱅글 돌며 가고 있다. 어디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