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에 폭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매미소리와 함께 여름날이 찾아왔다.
이번 여름에는 아직 바다에 한 번도 못 갔다. 하얀 포말을 흩뿌리는 검푸른 빛 파도와 바다냄새. 생각만 해도 코끝에서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다. 어린 시절 해수욕장에서 놀다가 코와 입에 파도가 순식간에 들이치면 숨도 못 쉬고 정신을 못 차렸다. 지금도 그렇다. 파도가 치면 한동안 움츠려 들어 온몸으로 파도를 철썩 맞는다. 한번 큰 파도에 얻어맞고 나면 다시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은 과연 내가 하는 걸까. 무작위로 떠오른 생각의 고리를 건너다보면 나도 모르게 그 흐름에 휩쓸려 있다. 하나 또 하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다 보면 어느덧 허리까지 바다에 잠겨있는 나를 발견한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판타지가 아닌 효용을 생각하라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논리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순수미술을 전공했던 나에게는 실용학문을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주장을 전개할 때는 그에 합당한 논거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절차상 미흡한 부분 없이 매끈한 과정, 타당성 검증과 사전 테스트를 통한 피드백, 최적화를 거친 결론이 제시된다.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채워나가며 구멍을 없애고 가장 그럴듯한 결과물을 정교하게 완성해 나간다. 연구는 재미있었고 뭔가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을 해나간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내 생각들과 가치관, 내 안 깊숙이 존재하던 세계를 들여다보고 만지작거리기를 멈춘 것도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합리적인 사고. 성해나의 <갈월동 98번지>를 읽으며 작중 구보승이라는 인물이 추구하는 합리성에 대해 계속 생각이 맴돌았다. 목표를 위해서만 내달리다 '인간을 위한' 건축이 무엇인지 종국에는 그 길을 잃어버린 구보승, 그리고 여재화. 어떠한 악의와 꿍꿍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보통 사람들처럼 눈앞의 과제를 치밀하게 들여다보고 해결하려 했고 주어진 기회를 잡고 성공하려 했을 뿐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도둑맞은 집중력>에 소개된 테크기업에 종사하는 엔지니어들도 그들이 세상을 더 낫게 바꿀 거라는 믿음과 굴지의 기업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에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사업 모델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합리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달린 결과로 설계된 기술들이 결국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게 되었는지 그들은 예상하지 못했다.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타협하고 조정한다. 하지만 달성된 그 '목표'는 무엇으로 치환되었는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문제가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거기엔 '인간'도 내가 추구했던 '나'도 없었다.
우울증은 어느 날 밀물처럼 찾아온 후로 끊임없이 간조와 만조를 오간다. 계기는 하나의 사건이었지만 오랫동안 차오른 결과로 시작되었다. 내가 목표라 애써 생각했던 것은 사실 한 번도 목표인적이 없었고 그동안 참고 또 참아온 것들이, 타협했던 것들이 나를 조금씩 부식시켰다. 파도가 사라지면 모래도 함께 사라진다. 파도는 목표로 했던 모래성만 타깃 하지 않는다. 그 주변의 모든 것을 함께 쓸어가 버린다.
인터뷰는 아주 순조로웠다. 블라인드 면접에서 나는 이름이 없다. 면접장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면접관들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내 말을 경청한다. 모든 질문에 적절하게 대답했다. 나는 이일을 하게 될 것이다. 질문들 속에 내가 노력하고 타협해야 할 것들이 나를 서서히 죄어온다.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마지막 답변이 끝나는 순간, 이름표를 떼어버렸다. 놀란 2-B는 얼어붙은 공기를 뒤로하고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생각은 하는 걸까. 결코 아니다.
무의식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생각에 빠져 매번 무자비하게 그 흐름에 휩쓸린다.
내가 만나는 파도는 모두 처음 만난 새로운 파도다.
그 속에서 길을 잃고, 다시 나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