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경 민주주의
"야아, 무라카미 씨, 곤란하게 됐습니다. 난처해요."
얘기를 들어보면, 분명 다카하시 씨가 말하는 대로다. 난처해하는 문제가 업무적인 일이든 개인적인 일이든 그는 대체로 굉장히 '일관성 있는' 방식으로 난처해하고 곤란해한다. 그렇다고 무의미한 푸념만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비관적이지도 않고, 자신의 무력함을 자학하며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저 단순히 긍정적으로, 열심히 난처해한다.
모두 둥그렇게 모여 앉아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야아, 곤란하군요" "좀 난처한걸요" "좀처럼 결론이 나질 않네요"하고 머리를 긁적이거나 수염을 만지작거리거나 팔짱을 끼는 것. 어디선가 빌려온 것 같은 결론을 들이대며 호언장담하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사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까?
말 그대로 요지경 세상이다. 온갖 극적인 미사여구로도 다 표현이 안된다. 분노와 경악의 소나기를 피해 고요한 책 속으로 대피한다. 창 밖에는 흑백의 가짜 같은 세상이, 책 속에는 진짜 같은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총천연색의 세상은 실로 책 속에서만 가능한 건지. 책에서나 보던 세상은 흑백 필름처럼 영사되어 절정을 향해 속도감 있게 내닫고 있다.
어제는 모두를 하얗게 질리게 만든 폭탄이 떨어졌지만, 언젠가부터 흑, 백 두 가지 색뿐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 세상에서는 컬러는커녕 회색도 어려운 듯하다. 희끄무레한 잿빛이나, 그레이, 회백색, 차콜, 얼룩무늬, 줄무늬들도 부감하여 죄 둘로 나누고 있다. 왜 우리는 같이 '긍정적으로 난처해하며' 회색지대에 살 수 없는 걸까. 그러면 안 되는 걸까. 둘러앉아 팔짱 끼고 '그것 참 곤란하군요' '난처한걸요'하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커피를 후후 불며 이러쿵저러쿵 얘기해 볼 수 없는 걸까. 이런 난처함을 공유하고 허허 웃을 수는 없는 걸까. 왜 우리는 각자의 결론을 호언장담하며 극단을 달리는 걸까.
누군가의 꿈이 움트고 자라던 학교를 락카 칠하고, 내 결론만을 내세워 시민들의 평화를 짓밟고, 정치적 잇속만을 챙기려 물어뜯는 아비규환의 세상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잘 다듬어진 '거짓말'을 무색하게 한다.
우리는 왜 이리도 곤혹스러운 사회에 살고 있을까. 하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무리하게 벗어나려 들면, 우리는 '진짜가 아닌 장소'에 도달하게 되고 만다. 곤혹스러운 사회에서라도 같이 난처함을 공유할 수 있었으면. 회색지대에서 서로 어깨를 마주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