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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눈길 Dec 06. 2024

계엄의 벽과 하루키의 알

나인 너, 너인 나와, 우리를 막아선 벽에 대하여

하루키씨에게.

당신의 이름 앞에 ‘친애하는’이란 단어를 적고 싶었지만 그만두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하면 왠지 근사한 글이 될 것 같았지만, 솔직한 마음으로 당신을 친밀하다 부를 순 없었어요. 당신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재미있게 읽었고, 지금도 책상 위에는 제 동거인이 재밌다며 권해준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가 놓여있지만, 글쎄요. 당신의 이름에는 전교에서 유명하지만 나와는 인연이 없는 친구의 친구의 친구 정도의 데면데면함이 있습니다. 저에게 당신의 책을 추천해 준 지인이 당신의 열렬한 팬이니, 아마도 ‘친구가 사랑하는‘ 정도는 가능하겠네요.


친구가 사랑하는 하루키씨. 그리고 언젠간 나도 사랑해 보고픈 하루키 씨.

당황스럽지만 당신의 ‘잡문집’을 읽으면서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모르겠어요. 맥주와 굴튀김을 먹는 당신을 상상하며 침이 고였던 부분이었을까요. 당신이 페이지 사이에 준비해 두었을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신발들을 나도 구경해보고 싶은 마음. 번갈아 발을 넣어보다 어느 순간 포근히 감싸오는 가죽의 감촉을 느끼게 된다면 나도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 같았어요. 설레는 마음으로 그 맞춤한 감각을 찾아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사랑하고 싶지만 쉽지 않은 하루키 씨.

예루살렘상 수상을 거절하지 않았다는 부분을 읽으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미 오래전 떠들썩했던 이슈를 이제야 알고선 호들갑 떤다고 흉을 봐도 어쩔 수 없어요. 425일째 꺼질 줄 모르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불길을 떠올리며 당신을 탓하고 싶어 졌던 나는, 당신이 예루살렘에 간다면 책 불매운동을 시작하겠다던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직접 만져본 것만 진심으로 믿는 당신 소설가들과 달리, 나는 내 눈과 손으로 겪지 않은 것도 진실이라 믿는 어리석은 부류에 불과합니다. 15년 전 당신의 수상 논란을 뉴스로 접했다 해도 그저, 하루키 씨, 실망이군, 하곤 냉담한 표정으로 당신의 책 앞을 지나치며 나의 얄팍한 정의감을 자랑했을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 하루키 씨, 당신의 다음 소감을 읽으며 내가 느꼈을 혼란은 오죽했겠습니까.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설마 둥근 모자를 쓴 머리를 통곡의 벽에 대고 기도하는 유대 랍비를 묘사한 건 아니겠지. 얼른 생각을 가다듬고 가자지구를 옥죄고 있는 수백 킬로미터의 분리 장벽으로 생각을 옮겨갔지만, 이번에도 저는 틀렸더군요. 하지만 이 문장을 읽던 날 제가 처한 역사적 맥락을 듣는다면 당신도 나의 해석을 마냥 탓할 순 없을 겁니다. 2024년 12월 3일 밤. 도쿄의 당신처럼 잠자리를 준비하던 서울의 나는 역사책에서만 보던 비상계엄이라는 당혹스러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마주했습니다. 2008년 명박산성이란 이름의 거대한 벽 앞에도 서본 적 있지만 이번엔 달랐어요. 숨처럼 자연스럽다 배웠던 말과 행동과 연대의 권리를 막아선 포고령의 벽 앞에 당신도 서본다면, 총성 없이도 가슴이 깨지는 알이 될 겁니다. 그래서 그 벽의 너머에 있는 것 같은 사람들, 그 벽을 세운 것만 같은 사람들 역시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 하나의 알’이라고 타이르는 당신의 말을, 못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알 것입니다.


어렵습니다, 하루키 씨. 이것이야말로 곤란하고 난처합니다. 술을 좋아하고 성미도 급하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만큼은 끔찍하여 5천만명의 안녕을 단박에 담보 잡을 수 있는 한 오빠 역시 ‘더없이 소중한 하나의 영혼과 그것을 감싸는 깨지기 쉬운 껍질을 가진 알’이라 생각해 보라니요. 오죽 외로웠으면 그랬겠냐며 그를 두둔하며 말벗이 되어주지 못한 나를 탓하는  그들의 영혼도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니, 나의 백지장 같은 정의심이 다시 바들거립니다. 당신은 아무리 난처한 결론 없는 상황도 공유하는 것만으로 든든한 실감을 줄 수 있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간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제10살짜리 아이에게 ‘몇몇의 알들이 다른 오천만개의 알들을 깨려 했어‘라고 말하는 장면을요. 어디선가 빌려온 것 같은 결론을 들이대며 호언장담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에 중요하다 당신은 말했지요. 하지만 부모란 부류는 왠지 옳고 그름을 결정하지 않고선 안절부절못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날 새벽 당신의 은유는 마치 쉬이 가시지 않는 체기처럼 내 명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외면하기보다 보는 쪽을 선택하는 하루키 씨.

당신의 눈에 보이는 벽은 무엇입니까. 어떤 시스템이 우리를 죽이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살해하게 만드나요. 나를 사랑하는 신에게 그를 벌해달라 말할 때 나의 종교는 벽이 됩니까. 나의 올바름이 그의 무도함이 될 때 나의 정의는 우리됨을 죽이는 걸까요. 능력주의라는 시스템으로 살아 숨 쉬는 영혼들을 가치로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눌 때, 사실 그는 나로 인해 살해되고 있는 거라면. 아아,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서울의 광장에는 너무나 많은 이름표들이 있습니다. 한남, 한녀. 일찍, 이찍. 금수저, 흙수저. 진지충, 일베충. 그 이름표들은 나와 너를 가르는 높은 벽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단단하고 냉혹한 벽을 이길 수 있을까요. 시스템이 우리를 이용하게 놔두지 말라는 당신, 답해주세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서로의 영혼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믿고, 그 온기를 한데 모을 수 있을까요.


알의 편에 서고자 하는 하루키 씨.

우리 한국어 어휘에는 모음 교체에 의한 어사분화(語辭分化; ablaut)의 흔적이 많습니다. 모음이 변화하며 어휘의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인데, ‘고소하다-구수하다’, ‘찰랑찰랑-철렁철렁‘ 등입니다. 약함과 강함, 밝음과 어두움 등 어감의 차이가 발생하긴 하지만, 본래의 의미에서 아주 벗어나진 않습니다. 오히려 ‘썩히다-삭히다‘ 와 같이 동일한 현상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한국어의 1인칭과 2인칭 대명사 ’나‘와 ’너‘도 이러한 분화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오랜 세월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나는 너고, 너는 나인 셈입니다.

명치에 단단히 자리 잡은 질문들을 움켜쥐고 당신을 원망하며 이틀을 돌아다니다 이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나일지도 모르는 하루키 씨.

누군가 미워질 때 나는 당신의 벽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내 자신이 한없이 고양되려 할 때 또 떠올릴 듯합니다, 당신의 알을. 나의 체기는 여전히 가라앉을 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길 선택하기 잘했다 생각합니다. 침묵하기보다 나에게 말을 건네는 쪽을 선택하여 주어 감사합니다. 당신이 준비한 또 다른 신발을 찾아, 복주머니의 페이지를 또다시 넘깁니다.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당신과 같은 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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