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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퍼 Sep 25. 2021

기묘한 냥이

솜이와 대화를 시작했다

솜이와 눈이 마주쳤다.

할 말 많은 아이처럼 뚫어져라 바라본다.

초록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 깊고 푸른빛이 도는 게 예사롭지 않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솜이는 암고양이지만 생긴 게 또렷하고 호기심 많은 개구쟁이처럼 생겼다.

2020년 4월 15일생이고, 그해 6월 18일 우리 가족이 되었다. 월령으로 17개월, 에너지 넘치고 애교 많은 고양이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 침대 발치에서 폴짝 올라오더니 내 팔을 끄집어 어디론가 가자고 한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솜이를 따라 욕실과 연결된 파우더룸 쪽으로 두발 자욱 정도 움직였을 때였다. 마치 바람에 홀린 듯 얇은 도화지가 된 것처럼 내 몸이 가벼워지더니 파우더룸 캐비닛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머릿속이 진공상태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몽롱해져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렸을까?


내 키만큼 자란 초록색 스투키와 뱅갈고무나무가 정원처럼 둘러 쌓인 안쪽에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정교하게 잘 다듬어진 대리석 테이블 가장자리가 소라 뿔 장식처럼 조각이 돼있었고, 야트막한 의자에는 앉으면 몸이 푹 잠길 것만 같은 커다랗고 편안한 쿠션이 놓여 있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초록색 눈을 가진 여자가 매력적인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며 맞은편 의자에 앉으라고 눈짓을 한다.

"지금부터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게요."

분명 우리말은 아닌 것 같은데..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사실 조금 긴장을 했지만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고 무섭거나 불편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낯선 얼굴이 분명한데.. 눈 빛은 매우 친근한 것이 솜이의 눈동자와 닮아 있었다.


"혹시.. 저를 알고 있나요?"

"물론이에요. 나는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알아요."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다고요?"

"네, 맞아요. 요즘 당신의 복잡한 머릿속 이야기 때문에 더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죠."

믿기지는 않았지만.. 나 보다 더 나를 잘 안다는 묘령의 여자와 대화를 시작해보기로 했다.


묘령의 여자가 눈을 돌려 바라보는 곳으로 내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그곳에는 화장대 앞에서 아이라인을 날렵하게 그리고 볼터치를 하는 서른 살의 내가 있었다. 화장을 새로 하고 이른 저녁식사를 하러 근사한 레스토랑에 갈 예정이다. 아침에 오토바이를 불러 빠통비치로 나가서 20~30분 태닝을 하다가  제트스키를 타고 놀다 들어왔다. 망고스틴과 코코넛 음료에 새우요리를 먹고 뽀송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다시 달뜬 마음으로 저녁 마실을 준비하고 있다.


하루에 화장을 두 번이나 할 수 있는 느긋함이란..

나는 원래 워커홀릭이었고 긴 머리를 감지도 않은 채 질 끈 묶고 출근하는 날도 많았다. 화장 잘하는 바지런한 여자들과 달리 일이 인생의 전부인 양 살고 있었다. 그런 내가 1년에 한 번 정도 시간을 만들어 쉼표를 찍는 방식이었다.


푸켓 다운타운에 있는 가성비 좋은 콘도를 잡고, 1~2주 시간을 내서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는 거다. 좋은 여행친구가 있어 푸켓 구석구석 숨은 명소를 동네 사람처럼 누비고 다녔다. 그 시간은 촘촘한 일상에 커다란 쉼표 같았다.


"서른 살의 당신이 그리운가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그때 느린 일상과 멍청하게 머리를 텅텅 비우던 그 느낌이 가끔 그립긴 해요."

"사실 요즘 많이 답답하거든요. 함께 사는 딸과 대화가 너무 어려워요."

"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생각해보니 대화가 막힌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어요. 19년 12월에 이사를 했으니까.. 1년 반이 넘었어요."


나는 어느새 묘령의 여자에게 학부모 상담이라도 하는 듯 지난 1년 반의 상황, 아이의 상태와 대화의 빈도와 크게 다투었던 일들까지.. 무엇보다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무성의한 딸 때문에 힘들고 상처를 받는다며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딸이 엄마에게 듣고 싶은 말은 뭘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어떤 말을 해도 귀 기울이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딸이 어떤 말이 듣고 싶은지 잘 생각해 보세요. 딸은 엄마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어요"

"생각해 볼게요. 오늘 제 얘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당신을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딸이 듣고 싶은 얘기가 뭔지 떠오르면 다시 만나기로 해요."

그녀는 어느새 홀연히 사라졌다.

커다란 스투키와 뱅갈 고무나무 정원도 보이지 않았다. 


하.. 낮잠을 자다 깼다. 솜이도 내 발등에 얼굴을 대고 졸고 있다.

내가 너밖에 말할 사람이 없나보다.. 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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