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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퍼 Dec 09. 2021

싱글 침대로 초대

네 모습 그대로 존중해

오랜만에 말을 걸어왔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배달의민족으로 시켜드린 저녁식사가 흡족했던 모양이다.

침대에 누워서 폰을 보고 있다가 내가 들어오니 무척 반기면서 안아달라고 한다.

싱글 침대 한편을 비집고 같이 누웠다.


어떤 마음에서였을까?

사춘기 딸을 키워본 엄마들은 잘 알 테지만..

아이 마음은 종잡을 수가 없다.

눈 맞춤을 피하고 쉽게 토라지고 말을 섞지 않으려 하거나 방문을 꼭 닫고 들어가기 일쑤다.

그런데 오늘 저녁 태도는 따뜻한 봄날 같았다.


게임에 열중할 때 내가 관심을 보이면 방해하지 말라며 등을 돌리던 아이가 오늘은 게임 계정을 열어서 보여줄까라고 묻는다.

우리 딸이 3년째 푹 빠져 있는 제5인격이란 게임의 세계에 드디어 나를 초대했다. 처음 있는 일이라 속으로 많이 놀랐지만.. 혹여 또 맘이 변해 토라질까 싶어 친절하게 반응하며 딸과 대화에 집중했다.


실력도 중요한데 정말 운이 좋아야 해

캐릭터를 하나하나 설명해주었고 아무나 쉽게 획득할 수 없는.. 마치 명품관에 진열된 한정판 같이 화려고 세밀하게 제작된 의상 아이템도 보여줬다.

획득한 스킨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실력도 중요하지만, 정말 운이 좋아야 가질 수 있는 아이템이라며 상기된 표정으로 설명해준다.


처음엔 생존자 캐릭터로 티어를 높여갔는데, 지금은 감시자 캐릭터를 공략 중이란다.

레벨이 7 티어, 랭킹에 0.3%라고 표기돼 있었다.

제5인격은 캐릭터마다 흥미진진하고 치밀하게 짜인 스토리가 놀라웠다.

좋아하는 캐릭터의 일러스트를 보여주는데 이런 걸 직접 그리고 싶어 하는 걸 알게 되었다. 

스토리에 관해서는 슬픈 이야기라서 더 공감이 간다고 했다. 그리고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은데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도 했다. 엄마가 아이패드에 깔아준 프로크리에이트 앱은 너무 좋다고 다. 아직까지 모든 기능을 다 사용하지는 못하는데 열심히 배우고 있단다.


역시 전문가의 조언은 중요해!

지난여름 방학 무렵 갤럭시 노트의 작은 화면에 뭔가 자꾸 그리길래 큰맘 먹고 태블릿 PC 구매를 결정했다. UX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지인에게 조언을 구하고 추천을 요청했었다.


"아이패드 에어가 가성비는 제일 좋구요. 프로그램은 거의 프로크리에이트라는게 압도적 일등이라 그거 사시면 돼요. 갤탭 같은 거 사주시지 말고 꼭 아이패드 사주세요. 두 번 사는 불상사 없이요. 프로크리에이트 + 굿노트 꼭 사주시구요 그럼 끝"


알려준 대로 아이패드 에어 4세대와 프로크리에이트를 깔아줬다. 굿노트는 프로그램 설명을 보더니 지금은 필요 없단다. 펜슬, 케이스 등등 액세서리도 구매하다 보니.. 사악한 애플의 굴레에 빠져들고 말았다.


모처럼 조잘조잘할 얘기가 많았나 보다.

맞아.. 우리 다연이는 걸어 다니는 라디오 같은 아이였지! 

매일 밤 내 귀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을 한 보따리씩 풀어놓던 아이였어.

게임 캐릭터 얘기부터 학교 친구 얘기까지..

팔이 뻐근해졌지만 팔베개를 거둘 수가 없었다.

제5인격 게임 캐릭터 일러스트 1
제5인격 게임 캐릭터 일러스트 2

나는 너를 존중해

너는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이야.

양치질과 잘 씻기, 학교 수업에 집중하기

이 두 가지만 지켜줘!

남은 시간은 모두 네가 결정하는 거야.

나는 네 모습 그대로 존중하기로 했어.


팔베개를 해주고 따뜻하게 안아줬다.

아직 안아달라고 하면 괜찮은 관계라더라.

이날 밤은 모처럼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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