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식이 미간을 찌푸린 채 교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본다. 저녁 8시 10분. 왜 이렇게 늦게까지 학교에 가두어 두냐고. 이게 대체 누구를 위한 자율학습이야! 그의 짝꿍인 준영이 귀에서 이어폰을 빼며 웃는다. "뭘 그렇게 실실 쪼개?" 민식이 그에게 묻는다. "LG가 역전했다. LG 5 해태 4, 7회 초." 준영이 킬킬거리며 이어폰을 도로 귀에 꽂는다. 그때 복도를 왔다 갔다 하던 근육질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불독이 교실로 들어온다. 그는 손바닥을 몽둥이로 탁탁 치며 교실을 스윽 둘러본 후 도로 나간다.
"세상의 어느 나라가 학생들을 감금해 놓고 공부를 시키냐고!" 민식이 중얼거린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결심한다. 창 밖에 있는 국기게양대가 보인다. 교실은 이층에 있고 국기봉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 창가에 앉은 영철을 작은 목소리로 부른다. "나랑 자리 바꾸자." 민식이 말한다.
"왜?" 영철이 묻는다. "왜긴 튀려고 그러지." 민식이 말한다. 영철이 그의 요구를 들어준다. 자리를 바꾼 후 민식이 책가방을 창밖으로 던진다. 그리고 심호흡을 내쉰 다음 창문으로 빠져나간다. 그는 긴 팔을 이용해 국기봉을 잡은 뒤 그걸 타고 마치 특수부대 요원처럼 주르르 밑으로 내려간다. 교우들이 와, 소리를 내며 창가로 몰린다. 민식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오른팔을 치켜든다. 그때 영철이 다급하게 외친다. "불독 온다, 어서 도망쳐! 빨리빨리!"
"젠장…" 민식이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운동장을 냅다 뛰기 시작한다. 불독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친다. "야이 개새끼야! 저 새끼가 대놓고 무결한 내 커리어에 흠집을 내네! 너 내일 학교 오면 물어뜯어 죽일 거야!" 불독의 무시무시한 절규가 민식의 뒤통수에 꽂힌다. 민식이 고개를 흔들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린다.
정문을 통과한 그는 성신여대 방향으로 계속해서 달린다. 아식스 대리점 앞에서 민식은 멈춰 선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는 공중전화부스로 들어간다. 여자친구인 유리에게 전화를 거는 민식. “오늘 야간자율학습 있다고 하지 않았어?” 유리가 말한다.
"있었지... 근데 영어참고서를 펼치고 관계대명사 공부를 하는데, 우리의 관계가 생각났어. 너랑 만나기로 한 토요일까지 참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유리야, 성신여대 앞 카사블랑카 알지? 거기로 나와라."
"오케이." 그녀가 말한다. 민식은 약속장소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카페 안에 들어서니 시카고의 “If You Leave Me Now”가 천장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많은 사람들로 실내는 붐볐다. 민식은 창가 쪽 테이블로 가 앉는다. 그는 목이 타는 듯 종업원이 건넨 물을 벌컥거리며 마신다.
이십 분이 지나자 유리가 카페로 들어선다. 그녀는 감색 재킷에 청바지를 입었는데 오늘따라 성숙한 대학생처럼 보인다. 민식이 일어나 성큼성큼 그녀에게 걸어간다. Casablanca. 한 줄기 노란 네온불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진다. 그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는다. 풋풋한 비누향이 그녀에게서 난다. 그녀의 눈을 보며 민식이 말한다. "너가 없었다면 난 정말 미쳐 버렸을 거야." 유리가 웃으며 그의 손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