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주방의 증기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증기가 먼저 꿈을 꾸고 그 꿈이 밤을 부르는 것이다.
회칼이 연어를 가르는 순간,
잘린 것은 생선이 아니라
오늘의 뒤통수에 붙어 있던 오래된 그림자.
세프의 욕설은 연기가 되어
천장에 매달린 갓전등의 입으로 빨려 들어간다. 동시에 신당동의 신호등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깜빡이며
서로를 바꾸어 달아 준다.
H의 미소는 접시 위에 있다.
접시는 그녀의 심장 안으로 미끄러져 간다.
절단면은 깊이를 잃고
안쪽에서 요나를 삼켰던 고래가 언어를 자꾸 밀어 올린다.
H의 가슴이 스테인리스에 비칠 때마다
앞치마가 먼저 그것을 바라본다.
몇몇 남자들의 젊은 시절이
기름 연기 속에서 몸을 부르르 떨고는 자랑거리를 얻어 달아난다. 제기랄, 목적을 위한 몸부림이여!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식당 뒤편의 어항에 들어가
물고기들과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고 있다.
YR은 술병의 마개가 아니라
술병에 잠든 누군가의 꿈을 연다.
새끼손가락으로 맺은 비밀이 허공에 떨린다.
약속들은 다리가 돋아 주방을 돌아다닌다.
이름들은 냉장고 문틈으로 기어들어가
성에의 결정들과 합쳐
아무도 초대받지 않은 겨울 하나를 만든다.
MJ는 말 대신
숨을 여러 겹으로 접어
김밥처럼 돌돌 감는다.
김발을 누르면 세상이
순간적으로 공평해지지만
그 공평함은 손끝에서 탈주해
환풍구를 향해 꼬리를 흔든다.
사케잔 속 물결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려 한다.
맑음은 누군가의 슬픔과 닮았고,
슬픔보다 먼저 태어난 빛과 함께 판당고를 춘다.
텅 빈 홀을 지나며 H는 불을 끈다.
실은 빛이 먼저 퇴장하고
그 뒤에야 스위치가 눌리는 것.
‘내일도 살아내야 하니까...’
H가 남긴 여운은 어둠의 표면을 찢고
천장에서는 핏방울들이 뚝뚝 떨어진다.
꽃잎은 처녀막을 통과해
저벅저벅 걸어온다.
천사는 그대들의 체온을 모아
몸 안에 넣었다가
다른 모양으로 흘려보내며,
아직 오지 않은 새벽의 여명을
먼저 식혀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