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 있는 대형 서점.
층고가 비정상적으로 높아
책들은 천장 쪽에서 안개와 더불어 증발하고 있었다.
계산대 위 전광판에는
오늘 하루 팔린 책들의 제목이 흘러가고,
바코드 소리는 심장 박동처럼
매 분마다 한 번씩 서점을 울렸다.
정정해 보이는 80대 노인이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그의 그림자는 노인보다 더 늙어 보였고,
허리는 훨씬 깊게 굽어 있었다.
고단한 20대 여자 점원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화면 속의 그녀는
이미 머리가 희어져 있었다.
이 세계의 그녀가 노인을 응대하는 동안
화면 속 그녀는 또 다른 인간들을 응대하고 있었다.
노인은 버럭 화를 냈다.
그의 말은 말풍선이 아니라
영수증으로 길게 출력되었고,
바닥에 닿자마자
잉크가 번져 알아볼 수 없는 얼룩이 되었다.
자기가 쓰는 카드의 잔고를 알려 달라며
노인은 단말마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그때마다 형광등이 한 번씩 꺼졌다 켜졌고,
먼지들은 잠시 공중에서 정지했다.
점원의 입에서는
언어 대신 작은 활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문장들은 빗방울이 된 채
노인의 발치에 고였다.
노인은 글자의 웅덩이를 발로 차며
더 크게 성을 냈다.
분노가 높아질수록
그의 카드에서는
숫자들이 새어 나왔다. 허공에서
노랗게 점멸하는 6789012345.
옆 계산대의 점원에게까지
노인은 화를 냈다.
그때 진열된 책 몇 권의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더니
“한계”, “잔고”, “소진”
이 세 단어를 골라
서점 안에다 흩뿌렸다.
단어들은 청년들의 어깨와 머리카락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아무도 닦아내지 못했다.
노인 뒤에 서 있던 청년 H는
입을 열기 직전,
자신의 언어를 더듬었다.
혀끝에 닿는 말의 온도가 낯설었다.
“그게 정말 가능하다면
가능하다고 하겠죠.”
서점의 천장에 보이지 않던 한 줄이 떠올랐다.
오래전에 설정된 비상 시스템 메시지.
[요청하신 기능은 이 세계의 현재 버전에서 지원되지 않습니다.]
노인은
그 문구를 본 것 같지도, 못 본 것 같지도 않은 얼굴로 멈춰 서 있었다.
그의 눈 속에서는
엊그제 들른 은행 창구 대기번호가
깜빡이고 있었다.
노인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자리를 떴다.
화장실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은
더 이상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여러 세대의 노인들이 겹쳐져 나타났다.
어떤 등은 곧게 펴져 있었고,
어떤 등은
두 손으로 땅을 짚을 듯 굽어 있었다.
바닥에는 고집 센 소변 자국이 생겨났다.
요실금처럼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옅은 잉크 찌꺼기였다.
카드 명세서의 글자들이 녹아
액체로 돌아간 흔적.
물자국은
화장실 방향으로 이어지다가
서점 지도 위의 파란 경계선과 겹쳤다.
잠시 후,
지도에서 경계는 사라졌다.
애초에
그런 노선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