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타미가 한 손에 생수병을 든 채 현관문을 열었다. 종성이 거실에 있는 가죽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타미는 냉장고에 탄산음료가 있으니 마시고 싶으면 알아서 꺼내 마시라고 권했다.
앤디는 냉장고에서 마운틴 듀 두 개를 꺼낸 다음 그중 하나를 종성에게 건넸다. 하타미가 치어스,라고 외치자 앤디와 종성이 그를 따라 음료수 캔을 머리 위로 들었다.
"Let's move to basement." 물을 길게 한 모금 마신 뒤 하타미는 말했다. 앤디와 종성이 그를 따라 지하실 계단을 내려갔다. 하타미가 지하실로 내려가는 통로 벽에 붙은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자 지하공간이 24K 황금색으로 환해졌다. 지하실 공간에는 방향제를 많이 뿌렸던지 아카시아 향기로 가득했다. 하타미는 지하실 중앙에 설치된 펄 드럼 세트에 앉았다. 앤디는 어깨 스트랩을 베이스 기타에 연결했고 종성은 마이크 스탠드 높이를 조절했다. 종성이 바지 주머니에 오른손을 반쯤 넣고 목을 덮은 긴 곱슬머리를 흔들었다. 앤디는 그런 종성을 보며 이제 보니 로버트 플랜트가 아니라 성룡을 닮았구나,라고 생각했다. 기타리스트인 경훈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는 나일스에 있는 미용실 '헤어 조각'에서 헤어드레서로 일했다. 군대에서 이발병으로 이발 기술을 배운 경훈은 손재주가 정말 좋았다. 그는 미국에 오기 전 서울 강남의 유명 미용실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었다. 시카고에 와서도 경훈은 그리 어렵지 않게 미용실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앤디는 두 달 전 경훈의 얼굴이 실린 신문 광고를 보다 배꼽이 빠져 죽을 뻔했다. 시카고 데일리 지면에 실린 미용실 광고 속 경훈은 한 손엔 가위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턱을 괴고 있었다. 그의 사진 밑으로는 "강남 미용계를 진도 7.5로 뒤흔들었던 매직핑거, 티에르 박, 연락도 안 하고 시카고에 나타나다",라고 쓰여 있었다.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경훈이 이런 광고에 나왔다는 게 윈디시티 파리들 멤버들에겐 놀라운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를 놀림거리로 삼기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앤디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이 그를 놀릴 때마다 경훈은 처음에는 자신도 광고에 정말로 나오고 싶지 않았지만, 미용실 원장이 끈질기게 제안을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현관문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티에르 박이 연락도 안 하고 도착한 것이다. 하타미가 지하실 층계를 뛰어 일층으로 올라갔다. "날씨가 정말로 변덕스럽네." 지하실로 내려오며 경훈이 말했다. 그는 기타 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안에서 일렉트릭 펜더 기타를 꺼냈다. 하타미가 경훈에게 펩시를 건넸다. 경훈은 펩시를 한 모금 마신 후 기타를 튜닝했다. 종성이 시간이 없으니 서두르자고 재촉했다. 펩시 캔을 단숨에 비운 경훈이 종착역 없는 기차의 전주를 연주했다. 종성이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불렀다. 하타미가 조심스럽게 심벌을 울렸다. 기타 전주가 끝나는 마디에서 앤디는 하타미와 눈을 맞춘 후 베이스 일 번 스트링을 힘 있게 둥둥둥둥 튕겼다. 종성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어 갔는데 컨디션이 좋은 듯 그의 음색은 매우 탁월했다. 그룹 멤버들이 종성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노래를 마친 뒤 종성은 자신의 목소리가 어땠냐며 멤버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타미와 경훈이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앤디는 종성이 내기 당구도 이기고 목소리도 기가 막히게 나오는, 그야말로 대단한 하루를 보내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타미가 드럼 세트에 앉은 채로 공연 계획을 잠시 설명했다. "지난번 토론한 대로 우선은 아시안을 대상으로 공연하자고." 하타미가 생수를 마시고 말을 계속했다. "물론 아시안은 중국, 일본, 한국인을 얘기하는 거야. 내가 차이니스 컬처럴 센터, 노스웨스턴 재패니즈 클럽에 연락하고 있는데, 곧 공연 날짜와 장소가 잡힐 거야." 하타미가 얘기를 마친 뒤 길게 자란 턱수염을 손으로 매만졌다. 종성이 나도 시카고 한인회랑 시카고 데일리 문화센터에 연락을 취하고 있으니 곧 답변이 올 거야,라고 말하며 하타미를 쳐다봤다. 하타미는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연을 하게 되면 몇 곡을 연주하는 게 좋을까?" 경훈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으며 물었다. 중간중간 토크도 하면서 공연을 한 시간은 해야 하니 일곱여덞 곡 정도가 이상적이지 않겠냐,라고 앤디가 제시했다. 하타미가 그럼 여덟 곡으로 하자며 드럼 스틱을 부딪혔다. 앤디는 자작곡을 한두 곡 더 추가하자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들이 최근 연습하기 시작한 "해변으로 떠나가요"의 도입 부분을 즉흥적으로 연주했다. 경쾌하고 빠른 템포의 곡이었다.
해변으로 떠나가요. 흥겨움을 느끼세요.
지난 일은 잊어버려. 오늘만을 생각해요.
주저 말고 떠나세요. 우린 벌써 떠나가요.
들려와요 파도 소리. 흥겨움을 느끼세요.
"종착역 없는 기차는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데. 이 곡은 마음이 즐거워져." 종성이 일절을 부른 다음 마이크를 손에 쥔 채 작사를 한 앤디를 바라봤다. 앤디는 빙긋 웃으며 베이스 4번 스트링을 둥둥, 두 번 튕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시간에 걸친 합주 연습을 끝낸 후 멤버들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거실로 올라왔다. 그들은 쉬면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하타미와 종성은 소파에 앉아 야구 얘기를 했다. 하타미는 이치로가 메이저리그에서 야구를 시작했다면 피트 로즈의 최다 안타 기록은 무조건 넘어섰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종성은 그의 의견에 동조하면서도 이치로는 마치 탁구공을 치듯 타격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고, 하타미는 그건 맞다,라며 껄껄 웃었다. 앤디가 시디 박스에서 CD를 하나 꺼내 오디오에 집어넣었다. 바든 파웰이 연주한 'All The Things You Are'가 보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와우 센티멘털한 게 죽이는 데, 누구 곡이야?" 종성이 묻자 앤디는 그에게 CD 케이스를 건넸다. "제롬 컨 작곡이라... 이 사람, 틀림없는 천재 같다." 로버트 마는 제롬 컨이 천재임을 표명했다.
앤디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도시중심부의 야경이 후기인상파의 컬러풀한 유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오늘따라 더욱 말이 없던 경훈은 피곤하다며 기타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아까부터 표정도 그렇고,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앤디가 경훈과 함께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경훈은 아무 일 없고 단지 컨디션이 저조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피곤해도 졸음운전은 하지 마라. 넌 걸핏하면 눈 감고 운전하더라. 졸음운전이 음주 운전보다 더 위험해." 스니커즈 끈을 조여 매는 경훈에게 종성이 말했다. 경훈은 알았다,라고 대답한 후 하타미의 집을 떠났다. 깊고도 푸른 밤의 블랙홀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는 경훈의 뒷모습을 앤디는 가만히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