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로부터 불과 나흘이 흐른 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하타미도, 종성도, 앤디도,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 아니 짐작할 수도 없는, 어느 누구도 설명이 불가능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경훈이 작별 인사도 없이 세상을 등진 것이다.(왜 자살은 주변인들에겐 언제나 갑작스러운 것일까) 경훈은 자신의 아파트 화장실에서 허리띠로 목을 매었다. 멤버들 중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알게 된 종성은 꺼억꺼억 울며 앤디에게 비보를 전했다. 앤디는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을 멍하니 주유소 카운터에 앉아있었다. 기름을 넣고 누가 도망치든 말든 그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의 가슴 한쪽에 어떤 날카로우면서 뜨거운 통증이 느껴질 뿐이었다. 앤디는 합주 연습을 했던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던 중 운전을 하며 경훈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앤디: 지금 어디냐?
경훈: 막 톨게이트를 지났다. 좀 전까지 같이 있었으면서 무슨 전화냐.
앤디: 네가 졸면서 운전할까 봐 말동무나 해주려고.
경훈(피식 웃으며): 졸음운전 안 한다니까. 근데 창문 좀 닫고 전화해라. 바람 소리가 너무 크게 울린다, 무슨 태풍이 부는 것 같아.
앤디: 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잠깐만(차 윈도를 닫은 다음), 이제 잘 들리냐?
경훈: 응, 이제야 잘 들리네. (사이) 어? 지금 나오는 그 노래, 조지 마이클 맞지?
앤디: 맞아. "One More Try."라고
경훈: 시디야?
앤디: 아니 라디오.
경훈: 채널이 어떻게 되는데?
앤디: 잠깐만 102.5.
경훈: 102.5. 찾았다. 이 노래 정말로 좋지...
앤디: 조지 마이클이 노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부르지. 진짜로 소울풀하잖아. 난 왬 때부터 좋아했어.
경훈: 왬 시절 노래들도 좋은 게 많지. 왬 노래 중에 넌 뭐가 제일 좋은 데?
앤디: Careless Whisper가 최고지. 넌?
경훈: 난 아무래도 Last Christmas라고 해야겠지.
앤디(웃으며): Last Christmas가 유명하긴 하지. 크리스마스 시즌이 오면 어딜 가든 들을 수 있는 노래니까. (사이)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생일이 아니라, 조지 마이클의 생일 같다.
경훈: 하긴 원래 성탄절은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날인데...
앤디(웃으며): 그렇지... 올해가 2006년이니, 예수의 2006번째 생일인 셈인데, 성탄절에 예수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지.
경훈(생각을 하다가): 너는 예수란 인물을 어떻게 생각하냐?
앤디: 글쎄다.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 참인간, 인간의 구원, 이웃사랑, 십자가에서 죽음. 뭐 이런 말들이 생각나는데, 너 생각은 어때?
경훈: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그가 신의 본체이면서 동시에 참인간이었다는 점에 대해선 솔직히 어떤 끌림은 있지... (사이를 두었다가) 근데 앤디야, 너는 참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냐?
앤디: 참인간이라... (사이) 너무 어렵게 가는데... 글쎄 인간이라면 모두가 참인간이 아닐까? 거짓 인간이란 없다고 생각하는데. 거짓말하는 인간은 있어도 인간 자체가 거짓일 수는 없잖아?
경훈(사이): 내 생각에는... 참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하지만 그럼에도 참인간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소망은 필요한 거 같기도 하고... (몇 초간 침묵을 흘려보낸 뒤) 근데 말이야... 요즘 참 이상한 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버지가 그렇게 보고 싶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죽은 아버지가 보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요즘은 아버지가 그렇게 보고 싶다.
방금 새가 떠난 나뭇가지처럼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앤디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경훈: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천국? 지옥? 아니면 완전히 소멸해 버렸을까?(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내가 괜한 소리를 하는 것 같다... 미안하다. 내가 다음에 족발하고 소주 살게.
그게 끝이었다. 시애틀에 사는 경훈의 형이 급하게 시카고로 날아왔다. 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불쌍한 내 동생, 불쌍한 내 동생을 연발했다. 아무런 유언도 경훈의 아파트에선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앤디와의 통화가 그의 유언과도 같은 것이 된 셈이다. "경훈이하고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다면서, 무슨 말 없었어?" 형이 앤디에게 물었다.
"그냥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통화를 마칠 때쯤에 경훈이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말을 했어요. 처음으로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앤디는 대답했다. 그 얘기를 들은 형의 눈에서 더욱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경훈이가 태어나던 해, 어머니와 이혼을 했어. 아버진 정말로 무책임한 사람이었어. 경훈이가 실제로 아버지를 본 건 서너 번밖에 안 돼.” 형이 흐느끼며 말했다. 경훈은 왜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야만 했을까. 대체 무슨 이유로 그는 세상을 등졌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앤디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그의 자살이었다. 경훈이 누워있는 관 앞에서 하타미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경훈의 표정은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에 마지막으로 스며든 희미한 감정의 흔적. 그 흔적을 보며 앤디는 어쩌면 경훈이 숨이 끊어지기 직전, 그렇게 보고 싶다던 아버지를 만났을지도 모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모든 장례 절차는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됐다. 경훈의 뼛가루는 노스브룩에 있는 마라나타 납골당에 안치됐다. 앤디는 차가운 눈물을 흘리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네가 왜 그렇게 떠나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경훈아, 넌 좋은 녀석이었어. 너는 정말로 아름다운 참사람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우리 술 마시러 가자." 하타미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앤디가 나일즈에 있는 장충동 족발집에 가자고 말했다.
"돼지 족발 괜찮아?" 종성이 하타미에게 물었다. "굳이 돼지 족발을 먹자고?" 하타미는 별로 내키지 않는 음식인 듯 주저했다. 경훈이가 좋아하던 음식이라고 앤디가 덧붙였다. 그러자 하타미는 그러면 자기도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앤디의 차로 다 같이 식당으로 이동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몰라도 족발집은 많은 사람들과 각종 음식들이 풍기는 다양한 냄새들로 넘실거렸다. 족발집 옆에 붙어있는 노래방에서 들려오는 돼지 멱따는 소리가 식당 벽을 뚫고 들어왔다. 종성이 시끄럽다고 하자 웨이트리스는 그들을 구석자리로 안내했다. 주문하시겠어요?,라고 웨이트리스가 지체 없이 바로 물었고, 앤디는 소주 두 병과 김치찌개 이 인분, 그리고 족발 대자를 갖다 달라고 했다. 종업원이 참이슬 두 병과 밑반찬 몇 개를 가지고 왔다. "감사합니다." 종성이 말한 다음 소주병을 들었다. 그는 하타미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병을 건네받은 하타미가 앤디와 종성의 잔에 차례로 술을 부었다. "우리 건배하자. 경훈이의 안식과..." 술잔을 들은 앤디가 말을 잇지 못했다. "경훈이의 안식과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종성이 이어서 말했다. 셋은 잔을 부딪친 뒤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웨이트리스가 어묵탕 한 그릇을 서비스라며 가져왔다.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하타미가 일본어로 감사를 표시했다. 종업원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앤디는 옆 자리에 앉은 남자들을 무심결에 바라봤다. 고티를 기른 웨이터가 족발 접시를 그쪽 테이블로 가져갔다. 그들 무리 중 한 남자가 그렇지, 이 정도는 되어야 라지 사이즈이지,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가로등 불빛이 블라인드 틈을 통해 식당 안으로 침투했다. 하타미의 홍채가 컬러렌즈를 낀 듯 주황빛으로 반짝거렸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 윈디시티 파리들은 어쩌지... 공연을 하려면 새로운 기타리스트를 구해야 할 텐데..." 그러자 종성은 잔을 비우고 입술을 떼었다. "하타미.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다.” "그래. 그건 시간이 좀 더 흐른 다음에 생각하자." 앤디가 어묵꼬치를 집으며 말했다. "난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아. 뭉툭한 걸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다고." 종성이 말한 후 셔츠 주머니에서 말보로를 꺼내 물었다. 앤디가 식당 벽에 빨간 글씨로 쓰인 Smoking-Free, 사인을 턱으로 가리켰다(시카고에선 2006년 올해부터 모든 식당에서 흡연이 금지되었다). 종성이 투덜거리며 담배를 도로 집어넣었다. 웨이트리스가 족발이 가득 담긴 접시를 들고 왔다. 그녀는 연이어 새우젓, 마늘, 쌈장, 상추, 작게 잘린 고추, 그리고 따라 나오는 반찬을 차례로 가져왔다. 족발의 양을 확인한 하타미의 눈이 황소처럼 커졌다. 종성이 허기가 졌던지 곧바로 족발 두 점을 상추에 올려놓고 고추와 마늘 그리고 쌈장을 첨가한 후 상추를 감쌌다. 하타미는 조심스럽게 그를 따라 했다. 하타미가 입안 가득히 족발을 넣고 입을 오물거렸다. 앤디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종성은 소주를 자작해 마셨다. 그의 미간은 일그러졌고 순간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제야 목소리가 트여 노래 좀 해보나 했더니. 그 자식 아주 형편없는 놈이야. 그런 놈을 내가 친구라고 믿었다니.” 종성이 손가락으로 눈물을 계속 찍어냈다.
"경훈이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앤디가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내 생각에 경훈이는 감수성이 너무 예민했던 것 같아. 전형적인 A형이었잖아. 소심하고 쉽게 상처받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마음속에 품어둔 상처들이 너무나 많았을 거야." 하타미가 혈액형을 근거로 경훈의 죽음에 대해 얘기했다. 종성은 칠이 벗겨져 허옇게 드러난 탁자 모서리를 보며 말했다. "내 생각에... 그가 죽은 이유는...” 종성은 잠깐 멈추었다가 입술을 떼었다. "경훈이가 그렇게 죽은 이유... 그런 건 없어...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에도 뚜렷한 이유가 없는 것처럼 말이야. 살고 죽는 것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도 목적도 없는 거야. 누군가 말했지. 모든 것은 무,라고. 그 말이 진짜로 맞아. 삶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거야." 말을 마치고 종성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엔 그래도 최선을 다해 우리 삶에 대해 그 의미를 찾고 목적을 부여해야지. 안 그래?" 앤디가 종성에게 따지듯 반문했다.
"야, 그러면 넌 종착역 없는 기차는 무슨 생각으로 쓴 거냐? 개같이 허무하고 우울한 그 노래를 작사한 사람은 바로 너라고!" 종성이 앤디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 그 노랫말, 내가 썼어. 근데 그 가사를 쓴 건 수년 전이야. 지금의 내 인생관은 변했어, 정말로 변했다고!" 앤디는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하타미는 대화가 지나치게 심각한 방향으로 치닫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헛기침을 크게 두 번 했다. 앤디와 종성은 계속해서 서로를 노려볼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무안해진 하타미가 커다란 족발을 뼈째 들고 마구 뜯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