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느 식당에서 (감자탕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테이블에 대충 나이는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의 네 남자가 앉아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게 되었다.
"이완용이 매국노니 어쩌니 욕들을 해도 그 사람이 난 사람이여. 이완용이 덕분에 우리나라가 개화되고 신식 문물이 들어온겨. 그 사람이 진짜 애국잔겨."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감자탕 그릇을 지긋이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이걸 저놈한테 끼얹고 나면 돈이 얼마나 들까...'
반쯤 먹은 감자탕 그릇 위로 순간 아이들 얼굴이 휙휙 지나갔다.
나는 그들에게 감자탕 세례를 주는 대신 그 테이블 쪽을 노려보았다. 한 10초 노려보니 그쪽도 낌새를 차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나는 아랑곳 않고 계속 쏘아보았다. 손에는 감자탕 그릇을 감싸 쥔 채.
정말로 감자탕 그릇을 던지고 싶었지만, 소심한 나는 그리 못하고 계속 노려보는 것으로 내 분노를 표현했다. 누가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굉장히 불편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내 눈길에 압도된 듯했다. 한마디라도 했다간 걸찍한 욕이 날아올 게 분명하고 젊은(?) 놈하고 욕하고 싸우면 자기들만 손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내가 노려보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인지한 그들은 이내 시선을 피하고 지들끼리 수군거렸다. 물론 이번엔 이쪽까지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나는 맞은편에 앉은 내 친구한테 큰 소리로 (그러나 식당에 있는 사람들 다 들리도록) 말했다.
"아 씨, 미국 참 좋아. 한국 같았으면 길바닥에서 맞아 뒈질 놈들도 멀쩡히 밥 처먹고 다니니...ㅎㅎ"
그들의 대화에 불편했던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식당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살짝살짝 고맙다는 눈길들로 나에게 보답했다.
+++++++
전두환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포털 맨 위에 떴다. 90세. 천년만년 살 것 같던 희대의 악마가 죽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죽기 전에 사과의 말을 듣기 원했다. 그냥,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되신 영령들께 죄송합니다.' 짧은 한마디라도 듣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버티다가 죽었다.
전두환은 최악이었다. 그 시절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가 광주에서 자행했던 만행들과 대통령이 되던 과정과, 집권 7년간의 폭압정치를 하나도 잊지 않고 다 기억한다.
전두환은 의회의 시녀화, 언론의 지배 도구화, 재벌과의 유착, 국민의식의 탈정치화, 국가보안법, 반공법, 집시법 등의 사회보호법으로 국민들을 숨도 못 쉬게 짓눌렀다.
전두환 정권 7년 동안 정치 규제법으로 검거된 사람은 유신체제에서의 4361명의 3배에 가까운 1만 2039명이다.
나는 전투경찰들이 캠퍼스 안에 들어와서 가방을 뒤집어 털어도 되는 때에 학교를 다녔다. 어떤 학기는 학교 간 날보다 문 닫은 날이 더 많았다.
우리 아버지는 전두환이 강제로 회사를 대기업에 합병시키는 바람에 실직자가 되셨다.
내 친구 아버지는 TBC에 다니셨었다. 방송국이 통째로 공중분해됐다.
우리 선배 하나는 택시 운전사와 시비가 붙었다가 어이없게도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그 전두환이 죽었다. 지옥에 갈 때까지도 사과를 안 하고 죽었다. 이 악마 때문에 죽은 수천의 원혼들이 그의 지옥길을 배웅할 것이다. 이를 갈며 슬피 울며 끌려갈 것이다. 타도 타도 죽지 않는 지옥불에서 영원한 고통을 맛볼 것이다.
나는 그가 사과를 안 한 것이 아니라 못 한 것이라 본다. 사과는 용기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럴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최소한의 용기도 없는 사람이 남들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전두환이 정치 하나는 잘했다는 인간에게 묻고 싶다. 사과하라는 여론이 들끓자 개에게 사과를 주는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린 깡패 같은 인성을 가진 반 사회주의자이다.
"어이, 당신은 뭐 하고 싶은 말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