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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꾼의 목장 Feb 17. 2021

천국의 숟가락

불가(佛家)에서 이야기하는 극락(極樂), 즉 천국의 모습은 이렇다.


천국에서 쓰는 숟가락은 그 길이가 삽자루만 해서 도저히 혼자서는 떠먹을 수가 없고, 누가 먹여 주어야만 입에 밥을 넣을 수가 있다고 한다.


누가 떠 주는 밥을 먹기 위해선 내 배고픔보다 다른 주린 이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상호간 절대적인 신뢰도 있어야 하며, 기다란 숟가락을 흘리지 않고 잘 받아먹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손과 내 입이 유기적으로 척척 맞아야만 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한 몸(지체)이라는 기독교 정신과 매우 흡사하다.


지옥에서 쓰는 숟가락의 모습은 또 어떠랴.


지옥에서 쓰는 숟가락은 그 크기가 딱 귀이개만 해서 쉴 사이 없이, 하루 종일 퍼 먹어도 배가 차지를 않는다고 한다. 귀이개로 밥을 퍼 먹는데 당최 남 신경 쓸 틈이 어디 있을까. 위아래도, 부모도, 친구도 형제도 없이 그냥 하루 종일 처먹는(?) 데만 집중해도 배고픔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 나 말고 누가 있겠으며 이타(利他) 정신 따위가 존재할 리 만무하다. 나밖에 모르는 지독한 이기주의만 남아 있는 사회, 내 이익을 위해선 타인을 밟고 올라서야만 하는 세상, 그곳이 지옥이다.


다분히 회화적인 불교의 천국과 지옥의 비유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입만 떼면 외우는 "사랑"이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한다.


얼마 전 서울의 모 교회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예방해 주는 카드를 교인들에게만 나누어 주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자고 나면 첨단 과학기술이 세상을 바꿔 놓는 요즘 그런 황당무계한 짓을 하는 목사나, 그걸 믿고 카드를 받아 드는 교인들의 무지함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일이었고, 무당도 아닌 교회에서 부적 장사를 한다는 것도 기가 막힐 일이었지만, 나를 더 화나게 한 것은 백 번 양보해서 정말 그런 것이 있다 해도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지, 자기들끼리만 살겠다고 자기 교인들에게만 나누어 주는 그 이기심이었다. 그곳은 이미 자기 몸을 죄의 대가로 희생한 예수의 이웃사랑은 온데간데 없고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만 남은 지옥 같은 곳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남 먼저 배불려야 (행복해져야) 나도 배불러지는 사랑이다. 내가 행복해지려면 내 손으로 먼저 기다란 숟가락을 들어야만 한다. 그리고 남 먼저 먹여야 한다. 그러면 굳이 천국 갈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미 천국이 된다.


반대로, 나만 배부르고, 나만 행복해지겠다고, 남들과 단절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는 삶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을뿐더러, 그 자체로 지옥의 예행 연습장이 될 것이다.


인생 칠십, 강건하면 팔십이라 했다. 평균 수명이 늘어 이제 구십, 백을 살아야 하는데 그 짧지 않은 인생을 천국 같이 살 것인가, 지옥 같이 살 것인가. 하루하루 무심히 흘려보낸 날들이 천국 같은 날들이었나, 지옥 같은 날들이었나. 매일매일 남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연습을 하는 것. 하나님이 그  외아들을 죽여가면서까지 이루고자 하셨던 그 본질의 사랑을 실천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리라.


* 타이틀에 사용한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제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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