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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꾼의 목장 Feb 17. 2021

비(雨) 이야기

오랜만에 단비가 내렸다. 먼 눈으로 보이는 산꼭대기에 눈이 하얗게 덮인 것을 보니 이번 비로 그동안 버석버석 말랐던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말랑말랑 해지는 것 같다.


30년 이상을 캘리포니아 사막기후에 살다 보니 이번 같은 폭우는 좀처럼 익숙하지 않다. 이렇게 갑자기 많은 비가 오면 마른땅을 적셔 주는 단비에 감사하기 전에, 혹여 바짝 말랐던 지붕에 틈이 생겨 빗물이라도 스며들지 않을까 걱정이 먼저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일기예보대로 (요즘 일기예보는 정말 정확하다!) 오늘은 비가 그쳤다. 며칠 동안 칙칙했던 기분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상큼해졌다.


오늘은 비(雨) 이야기나 한 번 해 볼까.



혼자선 힘(?)도 못 쓴다는 화투의 비광이다. 화투짝 안에 우산을 쓰고 서 있는 사람은 일본의 3대 서예가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오노도후(小野道風)이다. 일본의 한석봉이나 왕희지(王羲之)쯤 되는 셈이다.


오노도후가 젊었던 시절, 글씨를 아무리 연습해도 발전이 없어서 짜증이 났다.


"아, 이젠 더 못하겠다, 글씨 잘 써서 뭐하냐. 내 오늘 부로 때려치운다."


글씨공부를 그만두기로 작정하고 바깥으로 나왔더니 마침 장마철이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노도후는 다시 들어가서 우산을 들고 도포를 입고 나왔다.


공부는 그만두기로 작정했지, 비는 오지, 기분은 꿀꿀하지, 어디 가서 소주, 아니 사께 한 잔 하고 싶었을 성싶다. 터덜터덜 걷던 오노도후는 불어난 개울 속에서 떠내려 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고 있는 개구리를 발견했다. 화투 안에 있는 그림처럼 개울 옆에는 버드나무가 있었겠지.


"저놈이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 제까짓게 좀 있으면 쓸려 내려가겠지..."


오노도후는 쪼그리고 앉아 구경을 했다. 그런데 이 개구리란 놈이 비에 젖어 미끄러운 버드나무에 기어 올라가려고 용을 쓰고 있었다. 미끄러지기를 수십 차례,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버둥거리다가 결국에는 죽을힘을 다해 버드나무로 기어 올라가는 게 아닌가. 그걸 본 오노도후는 크게 뉘우쳤다.


"아, 저런 미물도 포기를 안 하고 나무에 기어오르는데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개구락지만도 못한 인생이 되겠구나..."


그 길로 다시 서당으로 돌아간 오노도후는 죽을 각오로 글씨공부에 매달려 마침내 일본 제일의 서예가가 되었다는 해피엔딩.




비광 화투짝 안에 있는 개구리는 포기를 모르는 끈기를 상징한다. 마치 숨겨 두었던 비광 하나로 멋지게 광박에서 탈출하듯이. 그래서일까, 다른 광은 광(光) 자가 아래 붙어 있는데 비광은 빛 광(光)이 위에 떠 있다. 마치 먹구름 뒤에 숨어 있던 붉은 태양처럼 보인다.


어딜 가나 불경기, 불경기. 게다가 비보다 훨씬 더 무서운 1년 가까이 이어지는 COVID-19 사태로 모두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암울한 터널을 지나가는 중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어려움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은 지겹게 비가 내리지만 내일은, 내일이 아니면 그다음 날은, 그다음 날이 아니면 그 다음다음날은. 결국은 해가 나타날 것이다. 시작된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것처럼.


엉덩이를 민망하게 드러낸 노란 개구리가 광(光) 대접도 제대로 못 받는 비광 안에서도 저리 해피한 몸짓을 보이는 이유는 희망이라는 끈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희망은 우리가 절망 가운데 있을 때에도 말라비틀어지지 않도록 공급되는 수액과도 같다. 그래서 희망을 단단히 움켜쥔 사람들만이 끝에 가서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불경기 속에서 힘들게, 힘들게 외줄 타기를 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의 핏기 사라진 얼굴을 쳐다보면 내가 먼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알맹이 없는 위로의 말 대신 저 노란 개구리가 그려진 화투장에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담아 그들에게 보내 본다.


사용한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제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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