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는 왜 늘 갈등으로 시작되는가?

제도는 있었지만, 노사관계는 설계되지 않았다

by 기록하는노동자

회사는 생존을 위해 다양한 제도를 설계하고 적용한다.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비용 구조가 달라지며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제도는 더 자주 더 급하게 만들어진다.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설계 과정에서
현장을 충분히 알지 못하거나
혹은 현실과 동떨어진 사례가 기준이 될 때 발생한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제도가 조직문화를 개선하기는커녕
오히려 희생만 강요하는 장치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사업장 휴가 5일, 갈등의 시작

우리 회사 사업장에는 추가로 5일의 휴가가 부여돼 있다.
그리고 우리는 2024년 초

이 휴가의 사용 방식을 둘러싸고 노사 간 갈등을 겪었다.


회사의 설명은 이랬다.
해당 휴가는 기상 변화 등으로 인한 사업장 단축근무에 대비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취업규칙에 기재된 내용은 단순했다.
사업장 휴가 5일을 부여하고
미사용 시 연차수당은 별도로 지급하지 않는다는 점만 명시돼 있었을 뿐
휴가의 사용 목적이나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은 없었다.


실제 현장에서는 이 휴가를 오랫동안 일반 연차와 동일하게 사용해 왔다.

제도는 있었지만 설계는 없었다

문제가 본격화된 시점은 연차수당 지급에 대한 부담이 커지면서였다.

회사는 어느 순간
사업장 휴가에 대해 공장장이 직권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공지를 냈다.
노동조합은 즉각 반발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노사 간 충분한 대화와 협의의 과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분명히 밝혔다.
이 사안은 충분히 협의를 통해 풀 수 있는 문제이며
제도의 취지와 현장의 현실을 함께 놓고 논의할 수 있다고.


하지만 회사는 끝내 대화를 거부했다.

사후 판단으로 끝난 노사관계

결국 이 사안은 노사 간 합의가 아니라 고용노동부의 판단으로 결론이 났다.


해당 조치는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에 해당한다는 판단이 내려졌고
제도는 원상 복구됐다.


갈등만 깊어졌고
회사가 말하던 ‘제도 개선’의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남은 것은
누구도 만족하지 못한 결과와
더 커진 노사 간 불신이었다.

왜 이런 갈등은 반복되는가?

이 사례는 특별히 악의적인 결정이어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분명하다.
제도는 먼저 만들어졌지만
노사관계는 그 이후에야 호출됐다는 점이다.


회사는 제도를 경영의 영역으로 판단했고
노동조합은 그 결과를 사후적으로 통보받았다.
그 사이에서 현장은 설명 없이 흔들렸다.


이 구조에서는
아무리 제도의 취지가 좋아도
상생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만약 협의의 시간이 있었다면

나는 지금도 생각해 본다.
그 당시 회사와 충분한 협의의 자리가 열렸다면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까?


예를 들어
사업장 휴가 5일을 회사의 의도대로 운영해야 했다면
그 변화를 단번에 밀어붙이기보다
4~5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조정하는 방식을 논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다른 복지 제도를 함께 개선하는 방안,
현장 노동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보완책을 병행하는 제안도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제안이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같은 문제를 놓고 서로의 입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
머리를 맞대는 경험 자체가
노사관계를 한 단계 성숙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회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제도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대화가 생략된 채 판단만 내려졌다는 점이
지금까지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상생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노사관계에서 상생은 제도를 막는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제도를 함께 설계하는 과정이 있을 때
비로소 상생의 출발선에 설 수 있다.


제도 도입 이전의 설명, 기준에 대한 공유, 시행 전 노사 간 논의가 있어야 했다.

이것은 요구가 아니라 노사관계의 최소 조건이다.


임금피크제든 휴가 제도든 앞으로 어떤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같은 방식이 반복된다면 갈등 역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개별 제도 하나가 아니라
제도를 다루는 방식 자체를 문제 삼는다.


이것이 우리가 한 걸음 물러나 현장을 다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상생하고픈노동자들의노조록18.jpg 고용노동부 조사 결과 해당 사안은 근로기준법 제94조에 따른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절차 위반으로 판단되어 시정 지시가 내려졌다
이 노조록은 상생을 위한 기록이며, 모든 연대와 토론을 환영합니다.
이 글은 노동존중사회로 가는 발자국이며, 함께 걸어줄 모든 손길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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