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의 온기와 감기 몸 사이에서

2026년 02월 16일 ~ 02월 22일 주간기록

by 기록하는노동자

설 연휴는 몸을 쉬게 하지만 마음까지 쉬게 하지는 않는다.
가족 사이의 온도와 조직의 긴장감은 동시에 존재한다.


명절 밥상 앞에서 정치 이야기를 삼키고
침대에 누워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나는 노동조합 폴더 53개를 떠올리고 있었다.

일은 줄지 않는다.
다만 하나씩 정리해 가야 할 뿐이다.


2월 16일, 맞춰 사는 법도 기술이다

설 연휴가 시작됐다.
화성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한자리에 모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던 탓일까?
친가 식구들과 나는 정치적 성향도 경제관도 다르다.


충돌할 지점은 많지만 명절 밥상 위에서 굳이 불을 지필 필요는 없다.

정치, 사회, 경제 이야기는 적당히 피해 간다.
맞춰주는 것도 기술이다.


그래도 명절은 명절이다.
어색함 위로 덮이는 따뜻함이 있다.
푸근하다.

2월 17일, 세뱃돈의 역설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했다.
세뱃돈을 받고 차가 밀리기 전 서둘러 서울 처갓집으로 이동했다.


처갓집에서도 세배를 하고 밥을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밤이다.

명절은 시작할 땐 길어 보이는데 끝은 늘 빠르다.


올해는 세뱃돈을 작년보다 많이 받았다.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작년보다 많이 나갔다.
그것도 기분이 좋았다.

순환하는 관계 속에 내가 서 있다는 느낌.
그게 명절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긴박했던 연휴 전의 일들은
마음 한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 연휴 이후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걱정한다고 일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대신해 줄 사람도 없다.

지치지만 말자.
그것만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되뇌었다.

2월 18일, 감기와 휴식의 강제성

연휴 마지막 날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평소 잘 걸리지도 않는 감기에 걸린 듯하다.
비상약을 먹었더니 졸음이 밀려왔다.

코를 훌쩍이며 침대와 한 몸이 됐다.

이럴 때는 억지로 의미를 찾지 않는다.
그냥 쉰다.

2월 19일, 느슨한 출근, 단단한 연결

컨디션이 조금 나아졌다.
송도공장으로 향하는 출근길이 가벼웠다.

왜 쉬는 날만 아픈지 모르겠다.


명절 직후라 업무는 비교적 한산했다.
연차를 더 써도 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분실된 송장을 현장에 다시 전달하고 좌표 찍어둔 공사 예정지를 둘러봤다.
느슨하지만 헛되지 않은 하루였다.


퇴근길, 조합원 한 명에게 연락이 왔다.
주말 조합 차량을 급히 렌트할 수 있냐는 문의였다.

일정이 비어 있어 가능하다고 답했다.

최근 차량 렌트 문의가 늘고 있다.
조합 복지 시스템이 실제로 활용되고 있다는 신호다.


우리 회사는 1~2월, 7~8월에 연차 5일 사용을 장려한다.
그래서 겨울·여름휴가 시즌이 따로 있다.

다가오는 여름엔 예약이 치열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녁에는 대학 시절 학생회를 함께했던 선후배를 만났다.
베트남에 정착해 20년 가까이 연락이 끊겼던 후배도 함께였다.

청년의 양심을 외치던 시절 좁은 원룸에서 뒤엉켜 살던 기억들이
40대의 우리를 다시 웃게 했다.


문득 생각했다.
20년 뒤 노동조합을 함께 시작했던 동지들과도 이렇게 웃을 수 있을까?

그러려면 지금이 다시 한번 가장 뜨거운 시기여야 한다.

2월 20일, 노동조합이라는 53개의 폴더

근로시간면제로 조합 사무실에 출근했다.
컨디션은 다시 떨어졌다.

코가 멈추질 않는다.

종일 서류 작업을 했다.

누군가 물었다.

“노동조합 업무가 그렇게 많아요?”

그래서 폴더를 열어봤다.
주제별 폴더가 53개다.

규약, 대의원대회, 공문, 단체협약, 임금교섭, 정책사업, 보도자료, 홍보물, 회의록,
부당노동행위, 소송자료, 노동부 질의회시, 연대활동, 차량관리, 회계자료…


매월 회계 공개.
매월 활동 카드뉴스 제작.
매주 이동사무실.
상시 민원 대응.
월례회의.
연맹회의.
복지시스템 운영.

그리고 그 실무를 위원장과 사무국장이 거의 전담한다.

전화 한 통이 30분이다.
이슈가 생기면 하루가 통화로 사라진다.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
하지만 단체협약의 틀이 그렇다.
근로시간면제는 늘 부족하다.
간부들도 각자 본업이 있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저녁엔 가족 식사를 했다.
렌트 차량 전달은 원격으로 해결할 줄 알았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는 연락이 왔다.

결국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스마트폰 키 복사로 해결했지만 차량 상태가 석연치 않다.


노동조합도, 차량도 관리에는 손이 많이 간다.

2월 21일, 휴일에 아픈 몸뚱이

결국 병원에 오픈런을 했다.
8시 10분 도착했는데 대기 18번.

1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평일엔 멀쩡하다가 왜 꼭 주말에 아픈지.

감기란다.
주사 맞고 약 먹고 하루를 눕다시피 보냈다.

2월 22일, 은퇴와 다음 장면

종일 쉬고 나니 한결 나아졌다.

저녁엔 처가 쪽 이모부님의 은퇴식이 있었다.
교직을 마치고 새로운 시간을 시작하는 자리였다.

선물을 드리고 식사를 함께하며 한 시대의 마무리를 축하했다.


그 사이 차량도 반납됐다.
스마트폰 키는 되는데 차량 키로는 시동이 안 걸린다.

다음 주엔 센터에 가봐야겠다.

사람도, 조직도, 기계도 점검이 필요하다.


명절의 온기, 감기의 나른함, 동지의 미래를 상상하는 저녁, 53개의 폴더로 쌓인 노동조합의 무게.


삶은 늘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따뜻함과 긴장, 벅참과 피로가 함께 온다.

그래도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리된다.

걱정이 일을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지치지만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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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노동존중사회를 위한 노동자의 기록이며, 모든 연대를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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