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시작해야 했다. 그게 내가 된 것 뿐
2022년 9월 3일 토요일 오후 2시 30분. 신도림역 2층 가온 대회의실. 8명이 모여 유진기업 노동조합의 설립총회를 열었고, 그 순간부터 유진기업 노동조합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때 나는 부천에 있는 레미콘 공장의 과장이었고, 회사에 매몰되어 일만 하던 사람이었다. 노동조합은 뉴스에서나 보는 이야기,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그저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가 부럽다’ 고 생각하던 사람이, 내가 직접 그 노동조합을 만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노동조합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던 나였다. 그랬기에 이 글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다시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유진기업 노동조합의 위원장이지만, 동시에 유진기업과의 근로계약이 강제 해지된 부당해고자 신분이다.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고, 잔인하고 슬픈 순간도 있었다. 기억이 왜곡되기 전에, 그리고 사라지기 전에 이 모든 이야기를 남기기로 했다.
이건 나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87%의 노동자들이 아직도 노동조합이 없는 현실에서, 이 기록이 누군가에겐 작은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
2023년 기준 대한민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3% 대부분의 회사에 노동조합이 없다는 뜻이다.
나 역시 노동조합이 없는 회사에서 14년을 일했다. 노동조합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했지만, 막상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호봉제가 연봉제로 바뀌고, 승진연한이 늘어나고, 근무시간이 바뀌어도, 우리는 투덜대며 소주 한 잔으로 털어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그때 불평 대신 행동을 했어야 했다.
나는 학창시절 도덕과 윤리를 정말 열심히 배웠다. 하지만 바르게 행동하는 것보다 회사의 기대에 부응하는 걸 더 중요하게 여겼고, 복종을 미덕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언젠가는 보상받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스스로를 갈아 넣고 살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런 기대는 깨졌다. 동료가 하나 둘 회사를 떠날 때마다, 후배가 회사를 욕하고 퇴사할 때마다 내 마음속에 무언가 쌓여가기 시작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게 정답일까?
떠나는 대신, 바꿀 수는 없을까? 그렇게 나는 노동조합이라는 ‘답’에 다가갔다.
노동조합을 만들겠다고 결심했을 때,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막막함’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지?
노동조합이 없는 회사에서 노조를 설립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노무사에게 자문을 받거나 한국노총, 민주노총 같은 상급단체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초중고, 대학교까지 16년 동안 노동조합에 대해 깊게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 조직률 13%라는 수치가 이해되지 않는 동시에 너무 안타깝다.
사실 절차 자체는 복잡하지 않다. 설립총회, 신고, 규약 작성 등 찾아보면 자료도 많고 양식도 많다.
하지만 문제는 ‘두려움’이다.
노조를 만들면 회사를 잃을까 봐, 찍힐까 봐,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까 봐…
그리고 나 역시 실제로직장을 잃었고, 회사의 괴롭힘을 받고 있고, 생계는 조합원 동지들의 도움으로 겨우 이어가고 있다.
헌법은 노동3권을 보장하고, 노조법도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지만, 현실의 법은 노동자의 편이 아니다.
무엇보다 금전적 격차가 너무 크다.
회사는 로펌을 동원하고, 우리는 지식과 시간, 발품으로 싸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은 견뎌낼 수 있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지만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그 두려움을 견디게 한다.
서로의 존재가 용기가 되고 연대가 버틸 힘이 된다.
두려움이 문제라면 극복하기 보다는 버티는 힘이 필수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동조합을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도 아주 미세하게나마 전진하고 있고,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경험을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지들과 나누고 싶다.
노동조합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아야 다음 세대가 지금보다 나은 일터에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당한 현실에 익숙해지면 바꿀 수 있는 기회조차 사라진다.
지금은 미약해 보이지만 우리 싸움의 기록과 흔적은 언젠가 누군가에게 '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단결이 없었다면 해고는 나 하나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조합은 단지 권리를 지키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울타리다.
나는 그 울타리를 지키고 싶다. 나보다 더 어린 누군가가 지금보다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도록...
노조가 없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 노조가 있어도 망설이고 있는 사람에게 이 글이 작은 용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글은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질 노동조합의 싸움에 대한 기록입니다.
공정한 사회를 위한 모든 목소리와 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