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싸우기 위해 태어난 노조가 아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대화를 원했다
유진기업 노동조합의 시작은 싸움이 아니었다.
우리는 회사와 함께 잘 일하고 싶었다.
노동조합은 회사를 무너뜨리기 위한 조직이 아니라,
회사가 더 건강해지기 위해 필요한 균형추라 믿었다.
애초에 노조 설립은 상급단체조차 없이 시작됐다.
그래서 처음엔 교섭보다 간담회를, 항의보다 대화를 제안했다.
노조 설립 초기, 우리는 “같이 이야기하자”는 말을 수십 번 건넸다.
그러나 회사는 법과 원칙만을 내세웠고
대화는 차단된 채 공문으로만 오갔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깨달았다.
더 이상 우리의 말을 들어줄 자리가 없다는 것을.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됐다.
우리가 원했던 건 다툼이 아니라 대화의 회복이었지만,
회사에는 그 싸움이 불편한 소란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싸움이 아니라, 닫힌 문 앞에서의 몸부림이었다
회사는 “경영권 침해”, “비밀”, “검토 중”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우리는 “해태다”, “법 위반이다”, “진정하겠다”로 맞섰다.
서로의 언어는 나름의 정당성이 있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통하지 않았다.
우리가 격하게 항의했던 건
회사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말 한마디라도 남기기 위해
우리는 싸워야 했다.
간이 흐르며 깨달았다.
싸움은 대화를 대신할 수 없고,
대화 없이는 싸움도 의미를 잃는다는 것을.
협력은 굴복이 아니다
우리는 ‘협력’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쓴다.
회사에 순응하거나 타협하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 오해가 쌓이면, ‘어용노조’로 불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진짜 협력이란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면서도 회사를 함께 세우는 일이다.
그건 양보가 아니라 전략이고,
타협이 아니라 지속이다.
협력은 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유일한 언어다.
우리가 다시 대화를 시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회사가 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이 회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싸움과 대화, 그 사이의 줄타기
이제는 싸움의 강도를 조절해야 한다.
모든 문제를 법과 언론, 정치권 연대로만 풀려 한다면
회사는 더 깊이 움츠러들 것이다.
하지만 침묵한다면
회사는 우리를 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싸우되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노조가 되려 한다.
공문을 쓰고 성명을 내더라도
그 끝에는 반드시 “언제든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문장을 남길 것이다.
물론 회사는 이런 공문이나 성명을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회사의 시선에서 노동조합은 여전히 통제 밖의 존재일 테니까.
그러나 그 문장 하나가
닫힌 문을 다시 두드릴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세워야 할 다음 단계
이제부터는 싸움보다 관계의 복원이 우선이다.
교섭이 아닌 간담회, 성명보다 차담회,
투쟁보다 ‘듣는 자리’가 필요하다.
근무시간 중 노사 간담회 제도화, 분기별 경영진 및 노조대표 회의, 노사공동 TF 운영으로 구조적 문제 해결 , 현장 조합원 의견을 정기적으로 회사에 직접 전달하는 시스템.
이런 대화의 장치가 쌓여야
노사관계가 사람 중심의 구조로 복원될 수 있다.
우리의 반성과 다짐
돌아보면, 우리가 가장 아팠던 순간은
회사가 우리를 ‘적’으로 대할 때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 과정에서 우리도 회사를 ‘적처럼 대해버린’ 순간이 있었다.
우리가 바라던 건 복수나 승리가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존중받는 일터였다.
이제는 그 초심으로 돌아가려 한다.
대화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다시 닫힐 수도 있다.
그래도 시도해야 한다.
우리가 싸운 이유도 버틴 이유도
결국 대화를 되찾기 위해서였으니까.
노동조합의 정체성과 관계의 새 틀
노동조합은 회사의 반대편이 아니라
회사를 바로 세우는 또 하나의 중심축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면서 회사의 지속 가능성을 함께 고민하는 존재,
그게 우리가 그리는 새로운 관계의 모습이다.
우리는 회사의 실패를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패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노조는 감시자이자 조력자이며 견제자이자 동반자다.
투쟁과 협력, 두 언어를 동시에 말할 줄 아는 조직.
그게 유진기업 노동조합이 앞으로 세워야 할 새로운 역할이다.
이 노조록은 대화를 잃은 자리에서 다시 말을 걸기 위한 기록이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회사가 우리와의 대화창구를 닫아도 우리는 계속 두드릴 것이다.
그게 노동조합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품격이다.
이 노조록은 상생을 위한 기록이며, 모든 연대와 토론을 환영합니다.
이 글은 노동존중사회로 가는 발자국이며, 함께 걸어줄 모든 손길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