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존중사회를 향한 조직의 선택
이상을 지키되, 방식은 달라야 했다
올해 임금교섭은 유난히 길었다.
단체협약을 맺고 처음 맞이한 교섭이었지만
서로의 마음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회사는 “현실을 봐달라”고 했고
우리는 “존중을 먼저 보여달라”고 했다.
대화는 오갔지만, 서로의 말은 어긋났다.
그때 회사가 말했다.
“동결이 확실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노력을 해보겠다.
노조가 위임으로 신뢰를 보여준다면.”
그 말은 위험했다.
신뢰를 조건으로 내거는 순간
책임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깨달았다.
지속되는 대립 속에서 대화의 문이 닫히면
그때는 진짜 아무 말도 남지 않는다는 걸.
조합의 결단, ‘노동의 실천’을 다시 세우다
교섭을 회사에 위임하자는 안건이 나왔을 때
처음엔 반대 의견이 거셌다.
“직접 교섭이 노조의 기본인데 왜 위임하냐.”
“이건 스스로 무력화하는 거다.”
하지만 며칠간의 논의 끝에 우리는 한 가지 질문에 멈춰 섰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맞서는 게 아니라 다시 말이 통하는 구조를 만드는 게 아닐까?”
결국 임금교섭과 관련해 조합원의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72%가 “현실적 보상이 있다면 위임 가능”이라 답했고,
그 결과를 공식 의견서에 명확히 남겼다.
“본 위임은 회사의 현실적 경영 여건을 감안하여 조속한 노사합의를 도모하기 위한 조치이며
어떠한 금액·조건·방향도 포함하지 않은 신뢰에 기반한 위임임을 밝힙니다.”
이건 물러섬이 아니라 노동의 실천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가기 위한 선택이었다.
“노조가 있는데 왜 위임하냐?”는 물음 앞에서
결정이 내려지자, 몇몇 조합원은 씁쓸해했다.
“노조가 있는데 왜 회사를 믿어요?”
“이게 협상이에요? 항복이지...”
그들의 말에는 분노보다 피로가 섞여 있었다.
오랜 교섭과 불신 속에서 모두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결정은 회사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회사에게 ‘책임을 함께 지자’고 요구한 것이었다.
회사가 스스로를 파트너로 증명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이건 신뢰의 포기가 아니라 신뢰를 검증하기 위한 노동의 실천이었다.
“노조가 있어도 현실은 안 바뀐다”는 말에 대하여
그 말, 틀리지 않다.
노조가 있다고 해서 세상이 하루아침에 변하진 않는다.
하지만 노조가 없으면 세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노조의 존재 이유는 싸움이 아니라 균형이다.
회사의 이익이 커질 때
그 무게추의 반대편에서
노동의 존엄이 기울지 않게 버티는 일이다.
그 균형이 바로 노동존중사회로 가는 최소한의 장치다.
신념과 생존 사이에서
위원장으로서 나는 오래 고민했다.
신념을 지키자니 조직이 흔들리고 조직을 살리자니 신념이 흔들렸다.
그러나 결국 깨달았다.
신념은 방향이지 방식이 아니다.
위임이라는 결정은 신념을 버린 게 아니라
신념을 지속시키는 다른 방법이었다.
노조의 목표는 ‘이기는 것’이 아니라 ‘존중받는 일터를 지켜내는 것’이니까.
노동조합이 존재하는 이유
노동조합은 회사의 반대편에 서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회사가 인간다운 회사를 유지하도록 지켜보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의 목적은 대립이 아니라 조정이고 갈등이 아니라 존중의 회복이다.
노동조합은 감시자이자 조력자이며 때로는 동반자이기도 하다.
이 세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세워야 할 새로운 관계
우리는 이제 싸움을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노동의 목소리를 지키는 실천을 이야기한다.
교섭보다 간담회, 성명보다 대화, 항의보다 제안.
이런 시도가 쌓여야 노사관계가 사람 중심의 구조로 복원된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작은 대화들이 모여
노동존중사회의 초석이 될 것이다.
멀리 가기 위해 한 발 물러서다
노동조합의 길은 언제나 외롭다.
때로는 버텨야 하고 때로는 물러서야 한다.
그러나 방향은 언제나 하나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사람이 중심인 일터로 나아가는 길.
우리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 선택도, 그 여정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물러선 게 아니다. 더 멀리 가기 위해 한 발 뒤로 디뎠을 뿐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노동조합은 어떻게 신념을 지키며 생존해야 할까?
노동존중사회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이런 작은 실천의 기록 속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우리가 다시 말을 걸고 다시 손을 내미는 순간부터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 노조록은 상생을 위한 기록이며, 모든 연대와 토론을 환영합니다.
이 글은 노동존중사회로 가는 발자국이며, 함께 걸어줄 모든 손길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