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도 노사상생을 위한 길이다
노동조합은 회사와 화해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
회사는 노동조합을 적으로 두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
그런데도 노사 모두 소송을 끊어내지 못했다.
이건 감정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였다.
갈등의 첫 장면, 법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우리의 소송은 2022년 11월 노동조합이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하면서 시작됐다.
대화보다 갈등이 먼저였던 노사관계에서 법은 노동조합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우리의 권리를 확인받기 위한 자연스러운 절차였지만
그 뒤로 이어진 끝없는 진정과 재판은 노사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다.
부당노동행위 재판은 지노위–중노위를 거쳐 두 건 모두 행정법원으로 갔고, 지금은 고등법원에 있다.
부당해고 사건은 1‧2심 모두 부당해고로 인정받았지만, 회사의 항소로 고등법원으로 향했다.
2023년 수시근로감독으로 회사는 미지급 임금과 연차수당 등을 지급해야 했다.
회사의 형사고발은 결국 불기소로 끝났지만 그 중 위원장 사건은 회사 검찰항고 후 재기수사 명령으로 지금도 검찰에서 계류 중이다.
우리는 올해 특별근로감독 청원까지 결정했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과정은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송은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보다 ‘누가 먼저 멈출 수 없냐’의 문제였다
회사가 항소하면 노동조합은 응소할 수밖에 없다.
응소하지 않으면 판결이 뒤집혀 버리고 앞으로의 모든 노사관계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어디까지 회사가 지켜야 하는지’ 기준이 사라진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패소판결이 그대로 확정되면
그것은 곧 “경영지휘 체계” 전체에 대해 불리한 선례가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족쇄를 채운 것이 아니라
제도와 구조가 양쪽 모두의 발을 붙잡아 놓은 셈이다.
소송은 대립을 뜻하지 않는다
소송의 장기화는 녹슬어가는 신뢰를 더 깊게 만들었다
노조는 소송을 좋아하지 않는다.
회사는 소송이 부담스럽다.
그러나 이 두 사실이 존재한다고 해서 이미 진행 중인 소송을 되돌릴 수는 없다.
소송은 원래 누굴 상대로 ‘싸우는’ 도구가 아니라
사실을 확인하고 책임을 규명하는 공적 절차다.
하지만 소송이 길어질수록 말로 풀 수 있었던 문제들이
서류와 증거만으로 남게 되고 신뢰는 아주 천천히 녹슨다.
특별근로감독 청원 철회
노사 간에 간신히 대화의 불씨가 살아났을 때
우리는 가장 큰 상징이었던 특별근로감독 청원을 철회했다.
이건 회사의 손을 들어준 것도 우리가 후퇴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다시 대화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노동조합이 문을 열면 회사는 그 문을 닫기 어려워진다.
마찬가지로 회사가 대화 창구를 열었기에 노동조합도 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작은 발걸음이지만 큰 방향을 바꾸는 시작이었다.
그럼 남아 있는 소송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멈출 수 없다면 관리해야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소송들을 노사 모두가 즉시 멈추기는 어렵다.
판결문은 과거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문서이지만
동시에 앞으로의 기준을 만드는 문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답은 명확하다.
소송을 끝낼 수 있는 진짜 방법은
소송에서 이기는 게 아니라 소송이 필요 없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포기할 수 없다.
대화와 합의로 앞으로의 원칙을 명확히 정해야만
소송은 자연스럽게 의미를 잃고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택한다
싸움을 끝내기 위한 방법은 결국 소송이 아니라 대화였다.
노사 갈등의 목적지가 승리는 아니라는 걸 우리는 이제 너무 잘 안다.
승패가 법으로 정해지면 상처받는 쪽은 반드시 생기고
그 상처는 또 다른 갈등을 불러온다.
나는 노사관계를 해결할 방법으로 헤겔의 변증법을 떠올린다.
"정–반–합"
노사관계도 그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의 핵심 수단은 당연히 대화다.
싸움은 과거를 겨누지만 대화는 미래를 만든다.
우리는 이제 그 미래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아주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노조록은 상생을 위한 기록이며, 모든 연대와 토론을 환영합니다.
이 글은 노동존중사회로 가는 발자국이며, 함께 걸어줄 모든 손길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