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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genia Mar 09. 2022

옛 곡물 운반로, 조양문 朝阳门

갤럭시소호, 녹미창, 지화사, 다팡지아후통, 81번지흉가 등




한동일 신부님의 <라틴어 수업> 책 중에 “Magna puerilitas quae est in me - 내 안의 위대한 유치함”이라는 구절을 읽으며, 내 행동의 이유와 호기심에 대해 공감을 느낀 적이 있다.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흐름’때문에 무언가가 갑작스럽게 궁금해지는 스타일인데, 북경의 한국인 거주지인 왕징의 랜드마크인 왕징소호(Wangjing SOHO) 건물이 유명한 이라크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작품이란 것을 알게 된 후, 그녀가 북경에 남긴 나머지 두 소호 건물도 매우 궁금해졌다.


한 곳은 갤럭시소호(Galaxy SOHO), 다른 한 곳은 리쯔소호(Lize SOHO)인데 갤럭시소호는 왕징에서 시내 나가는 방향에 있어서 오며가며 자주 마주쳤다. 더불어 내 안의 ‘마이너리티 기질’도 발휘하여, 이렇다할 유명 관광지 하나 없는 이 지역을 한 번 가보아야 겠다 싶었다. 뭐, 지인들에게 같이 가보자고 할 명분도 없을 때는 주로 혼자 다녀온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사라진 북경 성문들이 각각의 고유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내 눈에는 그 주변이 새롭게 보였다.


남방에서 올라온 곡식이 북경 성 안으로 들어오던 문, 엣날에 곡식의 의미는 풍요 그 자체였을 터. 타임머신 타고 온 듯이 현재와 과거 그 경계선인 현대적 건물과 후통의 대비와 조화를 동시에 느끼는 기분 좋은 산책을 할 수 있다.



"조앙문(朝阳门/차오양먼)은 원나라때는 제화문(齐化门)으로 불리웠으며, 명나라때 성루, 옹성, 전루를 재건한 후 조양문으로 개명했다. 명, 청나라 때 남쪽 지방의 곡물이 운하를 통해 수도인 북경으로 운송되었는데, 이 곳 조양문을 통해 이 주변 창고에 보관되었다. 창고를 채우는 날에는 곡식을 실은 수레가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현재 조양문 근처에 ‘녹미창(禄米仓)’, ‘해운창(海运仓)’, ‘신태창(新太仓)’ 등과 같은 지명이 남아 있는데, 모두 당시에 양식을 보관하던 창고였다."




조양문 지하철역 외관이 조양문 옛 모습 사진들로 쫙 도배되어있었다. 햇볓을 받아 반짝거리는 오래된 사진들을 한참이나 서서 바라보았다.


조양문과 성벽이 있던 그 자리는, 이제 세련된 건물들로 가득한 복잡하고 넓은 로타리로 탈바꿈했다. 강렬한 빨간 입간판만이 그 자리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조양문 인근에는 한국인이 즐겨 가는 관광지나 유명한 후통들이 없다. 한국인 거주지인 왕징에서 시내로 나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차로 지나쳐가는 장소일 뿐, 그리고 몇몇 커다랗고 주요한 건물들이 눈에 띌 뿐이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건물 세 개 – 갤럭시소호, 중화인민공화국외교부, 중화인민공화국사법부.

쭉쭉 뻗은 도로와 하루 종일 많은 교통량. 북경은 예전과 달리 청명한 하늘을 꽤 자주 보여준다.


갤럭시소호는 이라크 여성 건축가 故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작품. 2004년 여성 최초로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 수상한 그녀는 세계 곳곳 굵직한 건축물 다수 남겼는데, 우리에게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 설계자로 잘 알려져 있다. 중국 내에 부동산 기업 소호와 손을 잡고, 북경에 3개, 상해에 1개의 소호 건물을 설계했다고 한다.


갤럭시 소호는 부드러운 곡선이 껌 늘여놓은 듯 연결되어 시선을 사로잡는 건물이다. 이 곡선들은 동양화적인 매력과 맞닿아있다. 건물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마음이 편해지고 주변과도 조화롭다. 중국, 특히 북경에서 (요즘엔 그래도 많이 세련되어지고 있다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튀는 건물, 돈 많이 들였다 과시하는, 요상한 모양의 건물들이 종종 있어서 더욱 비교가 된다.

북경 갤럭시소호 (银河SOHO), 2012년 완공 - 내부에 상점, 식당, 까페들도 많다.


조양문 근처의 마법은 갤럭시소호에서부터 시작이 되는데, 담벼락 하나 사이로 현재에서 과거로 타임슬립되는 듯한 마법이 시작된다.

빨강옷에 빨강 카트를 끄는 아줌마의 색감이 흥미롭다.


갤럭시소호 뒷편에 남아있는 조양문 근처의 여러 후통들. 원,명,청대를 거치며 중심부에 3,000여개 뻗어있는 ‘후통胡同’이라 불리는 이 옛 골목들이 거리명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후통마다 개성있는 이름들 읽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

작은 패방, 남쪽 수문, 북쪽 대나무막대, 남쪽 대나무막대, 심지어 신선한 후통까지?!





조양문 근처는 유명한 관광지도 거의 없고, 난뤄구샹이나 우다오잉같은 유명한 후통도 없는데, 그렇게 때문에 북경에 거주하는 나로서는 일반인의 거주 모습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이런 후통이 더 정감간다.

갤럭시소호 바로 뒷편의 다팡지아후통(大方家胡同)을 길게 걸어보았다.


2월 말, 아직은 쌀쌀하지만 나뭇가지 끝에서는 이미 봄이 느껴진다.


  다팡지아후통에 숨겨진 보물 같은 식당이 있다. 스페인의 하몽과 비슷한 제작 방식으로 오랜기간 절여말리는 슬로푸드의 대명사 운남햄(云南火腿/윈난훠투이) 전문 식당 Under Clouds (大方家胡同8) 바로 그것. 가격대가 높은 코스 요리밖에 제공하지 않지만, 아직 운남여행을 해보지 않아서 그에 대한 로망이 상당하기 때문에, 제대로된 요리라도 만나보고 싶었고 대만족이었던 식사였다

아는 사람만 예약하고 찾아온다. 어떻게 하면 눈에 안 띄고 후통 골목에 녹아들까 고민한 식당이다.


다팡지아후통을 크게 돌아 맞은편 루미창후통(禄米仓胡同) 걸었다.  후통 이름의 유래인 녹미창 (禄米仓, 루미창) , 시기 베이징 관리들의 녹봉을 저장하던 창고다. 민국시기 1911 이후 군복창고로 사용되었다. 곡식 운반 통로로 이용되는 조양문의  역할과 위엄의 흔적을 느낄  있는 골목이다.

(좌) 루미창후통 표지판 (우) 곡식창고는 현재 개방되어있지 않아서 인터넷 자료 사진으로 대신


루미창후통 골목에는 이 근처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데, 베이징에서 보존 상태가 좋다고 알려진 명대 사찰인 지화사(智化寺)가 위치해있다. 1444년에 세워진 고찰로서, 불교예술 의 진귀한 보물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데, 현재 보수를 위해 임시 휴관 중이라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지난번 방문시에는 미처 사전예약을 못해서 입장을 거절당했는데, 이번에는 공사라니… 다음에 다시 이 후통을 방문해야할 ‘그럴듯한 이유’를 남겨놓았다.



조양문 근처 후통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 후통 골목 너무 우뚝 선 갤럭시소호와 어우러지는 이 장면이야말로 북경 내성, 지하철2호선 근처에서 볼 수 있는 현대와 과거의 경계이자 조화를 잘 나타낸다.




예전에는 몰랐던 조양문 근처 깜짝 스팟을 발견했다. 걷기의 즐거움은 이런 찰나의 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조양문내대가81번지 (朝阳门内大街81号)

이곳은 흉가, 일명 귀신의 집(鬼楼)으로 알려진 곳이다. 오랜만의 조양문 근처 나들이여서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추가 검색을 해보니…

북경에 4대 흉가 중 하나로서, 이 저택은 미국 선교사가 1910년 언어훈련센터와 휴식처로 설립한 곳으로, 90년대 말부터 방치되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네티즌들이 이곳을 베이징 4대 흉가의 으뜸으로 꼽을 정도로 귀신이 나온다는 일화가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곳에서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이나 보름달이 뜨는 밤이 되면 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리고 유리병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현재 내부 관람 불가. 까치발하고 담벼락 너머 사진 찍는 경험. 이 저택을 주제로 하여 2014년 <京城81号> 영화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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