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식거리 꾸이지에, 용왕을 가둬놓은 북신교, 곡식창고, 중의약대학단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저자로 유명한 신경정신과 전문의 올리버 색스는 매우 독특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단순 취미라기에는 상당한 전문 지식을 토대로 하여 여유 시간을 쏟는 분야, 그것은 바로 ‘양치류’ 연구와 탐험이었다. 양치류라고 하면 고사리 정도만 떠오르는 나로서는 그 독특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양치류를 탐험하러 멕시코 남부 오악사카 지방으로 탐사여행을 떠난 에세이집 <오악사카 저널>을 읽고 매우 유쾌한 느낌을 받았다. 색스는 아마추어란 애호가, 즉 해당 분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를 내렸으며, 신경정신의로서의 직업 전문 분야 외에 그가 양치류에 쏟는 마음의 크기가 적당히 잘 표현된 정의라고 생각했다.
내가 거주하고 사랑하는 북경에서, 내가 무엇인가에 애정을 갖고 꾸준히 한다면 나 또한 ‘애호가’라고 수줍게나마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싶었다. 중국음식 애호가, 중국어 애호가, 중드 애호가, 까페 애호가, 서점 애호가 등 다양한 북경 애호가들이 존재할텐데, 나는 ‘성문과 후통의 옛 이야기’ 애호가로서 본업인 주부 외에 나의 북경 시간을 채워나가고 있는 것 같다.
“동직문(东直门/동즈먼)은 과거에 남방에서 운하를 통해 운반된 기와, 벽돌, 목재들이 성으로 들어간 문으로서, 벽돌기와 가마들이 모두 동직문 밖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성문과 성벽이 모두 철거되고, 지하철 2호선과 동직문시외터미널을 중심으로 한 교통의 허브로서 유동인구가 많고 대형 건물과 상점들이 들어섰다.”
목재를 운반하는 통로였던 동직문 근처에는 관을 만들 나무가 세워져 있고, 관을 만드는 집이 많았는데, 그 거리에 밥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북적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그래서 밥집이 모여들고 홍등을 켜고 장사를 해서 예전부터 귀신거리, 즉 꾸이지에(鬼街/귀가)로 불렸는데, 정부에서 지명을 바꾸려하자 상인들 반대가 심해 같은 발음이 나는 '꾸이지에(簋街/궤가)'로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 꾸이지에는 야식거리로 유명하다.
*궤(簋)는 고대 청동기 혹은 도자로 만든 음식을 담는 그릇을 의미.
동직문내대(东直门内大街)가 대로를 따라 꾸이지에 야식거리까지 걸어보려는데, 예전에는 못 보았던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다. 중국의 맛집 및 여행지 통합 검색앱 ‘다종디엔핑(大众点评)’을 검색해보니, 오호라~ 일명 “왕홍슈(网红树/왕홍나무)”라는 별칭이 붙은 이 근처 유명한 나무였다. 감각적인 사진이 온라인 상에서 이슈가 되는 듯 한데, 실상은 공사 가림막 앞의 한 그루 나무일 뿐이다. 붉은색과 회색의 뒷배경 조화가 모던하고 나무 모양도 예뻐서 예술적인 한 장면이 연출된다.
동직문 사거리부터 서쪽으로 1.5km 직진하여 쭉 가면 북신교역이 있는 곳까지 야식거리가 형성되어있다. 가는 내내 이 지역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簋” 글자 디자인이 가로등에 장식되어있다. 적어도 길 잃을 염려는 없겠군.
쭉쭉 걷다가 만난 풍경 중에는 베이징런들의 일상 모습에 눈길이 가는 경우가 많다. 남관공원(南馆公园)에서 만난 정겨운 풍경 속에 따스한 초봄 햇살 아래 머리깎는 할머니, 그리고 조부모 손잡고 나들이 나온 아기가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우리 친정 부모님도 직장인이었던 나 대신해서 큰 애 어릴 때 저렇게 매일 공원 나가셨을 텐데.
걷다가 갑자기 나타난 러시아글자에 의아했는데, 알고보니 근처에 러시아대사관이 인접해 있어서 러시아 주민들도 있고 러시아문화센터(俄罗斯文化中心)도 있었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국제정세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시기라서 나도 모르게 눈에 힘 주고 지나가며 쳐다보게 되었다. (내 마음 속 혼자 시위 중) 그러다 또 마주친 <韩香馆Saveurs de Coree> 한국식당 간판을 보고 말랑해진 반가운 마음에 찰칵. 조미료의 천국 중국에서 No MSG라는 문구가 인상적인 식당이라 나중을 기약해보았다.
동직문 근처 와 본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샅샅이 걸어본 건 처음이라 새로운 풍경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걷다보니 내가 어느새… 북경중의약대학(北京中医药大学) 그리고 각종 대학, 연구소, 병원, 기숙사 등 대규모 단지를 형성하고 있는 지역 한 가운데였다. 걸어도 걸어도 다 중의학 건물들만 보였다.
병원과 연구소 건물 가득한 사이로 힐끗 힐끗 나타나는 옛 골목 후통들도 놓칠 수 없었다.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몇몇 포인트들을 우연히 발견하는 재미를 느낀 산책이다.
옛 곡식 운반로였던 조양문 인근에도 곡식창고가 있듯이, 조양문과 가까운 동직문 부근에도 남방에서 수로를 이용해 올라온 곡식들 저장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1900년 팔국연합군의 베이징 침략 이후 곡식창고의 역사는 끝이 났다. 현재 남아있는 창고 7곳은 모두 베이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북신창(北新仓)
해운창(海运仓)
신태창(新太仓)
1.5km 기분 좋은 걷기 끝에 꾸이지에에 도착. 3월 초인데 기온이 높지만 봄답게 바람이 변덕스럽다.
양쪽으로 쫘~악 늘어선 식당들, 이 곳의 대부분 식당 메뉴는 마라롱샤(민물가재), 양꼬치, 훠궈 등이다.
사실 이 곳은 야식거리답게 밤이 더 아름다운 곳일텐데… 4시 땡 아이들 귀가에 돌아가야하는 신데렐라 주부에게 야식거리 직접 방문은 언감생심이라 인터넷 사진으로 대체해본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범죄도시>에서 배우 윤계상이 연기한 장첸이 먹는 음식으로 유명해진 마라롱샤. 민물가재를 삶아 매운 마라 양념에 무친 요리인데, 요즘에 한국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을 만큼 유명해졌다고 들었다. 중국 남방 후난지역에서 시작된 요리로서 맥주 없이는 먹을 수 없는, 여름에 제격인 맛이다. 코로나 사태로 막힌 하늘길이 열려서 가족과 지인들이 다시 북경을 방문하게 된다면, 이 곳 꾸이지에 거리로 모시고 와서 함께 즐기고 싶다.
드디어 동직문에서부터 이어온 꾸이지에 거리의 종착역!
북신교는 북경을 물바다로 만들려는 용왕을 무찔러 가두고 그 위에 다리를 지었다는 전설을 지닌 곳이다. 이 사거리 위쪽으로는 옹화궁, 국자감, 공자묘, 지단공원 등 북경 내 유명한 관광지가 몰려있는 핫 플레이스이고, 왼쪽으로 더 가면 대표적 후통 관광지 난뤄구샹이 있다.
북신교 지하철역 C번 출구 뒤쪽에 위치한 스즈키키친(铃木食堂)에서 지친 다리를 쉬며 점심 먹는게 내가 계획한 이 날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2층에서 내려다보던 후통 풍경에 나도 모르게 홀린듯이 내려와 그냥 걸었다. 점심만 먹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은 이렇게 또 변경이된다. 목적지도 아니었고 계획도 없었지만 어느 식당 간판이 멋있다는 이유로 한참 쳐다보다가 한 번 걸어보기로 했다.
후통 골목에서 나와 큰 길 따라 걷다보니 유난히 따뜻해진 날씨 덕에 땀이 나고 목이 말랐다. 북경 전통 가옥인 사합원을 개조한 까페가 요즘 참 유행인데, 이 근처 셀프커피 self coffee (东四北大街125号)도 그 중 하나. 결국 아이스커피 한 잔으로 일정을 '진짜' 마무리했다.
내게 너무 사랑스러운 옛 건물들의 스카이라인과 나무, 그리고 베이징 블루 하늘의 조화로 마무리된 동직문 나들이. 오늘도 잘 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