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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genia Mar 23. 2022

옛 분뇨 운반로, 안정문 安定门

화원후통, 팡지아후통, 우다오잉후통, 국자감 & 공묘거리, 지단공원 등



주저는 사치일 뿐. 그냥 나가, 후통으로.


한 때 영화 《스타워즈》의 광팬으로서 나의 모토는 “Do or do not. There is no try." 였다. 내 이메일 꼬리말이 오랫동안 이 문구였는데, 에피소드 5 <제국의 역습>편에서 루크 스카이워커가 요다에게 특훈을 받으면서 제다이로서 눈뜨게 되는 장면에 나오는 대사이다.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계속 의심하느라 실력발휘를 제대로 못하는 루크에게 요다가 일침을 놓는 말 - ‘하거나 하지 말거나. 한 번 해본다는 건 없어!’ 학창 시절 원체 소심하고 소극적이었던 나 자신에게 힘을 주는 주문처럼 애용했던 문구이다.


눈 뜨면 맞이하는 새로운 하루는 선택의 연속이다. 전날 잠들기 전에 활기차고 알찬 하루를 각오해보지만, 막상 눈 떴을 때는 마음이 달라지기도 한다. 뭐 대단하거나 중요한 이유도 아니라, 몸이 찌뿌둥해서, 날씨가 안 좋아서, 그저 갑자기 귀찮아져서.


예전에 비해 아주 많이 좋아졌다고 하는 베이징의 하늘. 난방을 시작하는 겨울과 황사가 시작되는 봄이면 미세먼지와 모래먼지의 공격으로 정신을 못 차리던 때가 있었다. 해를 거듭할 수록 공장과 난방 문제, 사막화 문제를 해결하려는 중국의 노력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어서, 지난 가을과 겨울은 유난히 맑고 파란 하늘인 ‘베이징블루(北京蓝)’를 마음껏 누렸다. 하지만 가끔 나타나는 우울한 하늘은 여전히 어느정도 감내해야 할 북경 거주민들의 숙명이다.


우마이(雾霾/미세먼지) 낀 하늘을 맞이한 아침. 갈까 말까, 갔다 금방 돌아올까, 내일로 미룰까… 아주 살짝만 고민 후 집을 나섰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한 후 우리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당장 Right Now'일 것이다. 내일로 미루는 것은 사치일 뿐. 옛 골목 후통은 맑은 날이 아닌 흐린 날 어쩌면 더 잘 어울릴 지도 모른다. 많이 걷기 대신 쉬어 가보자. 가장 편한 옷과 신발을 신고 손때 묻은 에코백에 읽다 만 책 한 권 집어넣은 후 길을 나섰다. “Do or do not. There is no try”




 

“안정문(安定门/안딩먼)은 고대에 분뇨차가 지나던 길이었는데, 이는 땅의 신을 모신 지단(地坛) 부근이 주요 분뇨장 자리였기 때문이다. 옛날에 생문(生门)이라고도 불렸으며 이는 나라를 안정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황제는 매년 이 문을 통과하여 지단에서 기곡풍년 기원 제사를 지냈다. 또한 안정문은 군대가 승리한 후 돌아와 해산하는 문의 역할도 했다. 1950년부터 철거가 시작되어 1969년에 모두 철거되었다.”


(좌) 1860년 이탈리아 종군기자 Felice Beato가 찍은 사진  (우) 1969년 철거 중인 안정문 (출처 : 베이징관광국)
1971년 완공된 2호선 지하철역 안정문과 머릿돌
성문이 사라진 사거리에는 이제 ‘안정安定’이라는 글씨와 청동궤 모형만이 과거를 기억한다




분뇨차의 문 = 분뇨장 = 거름, 풍요, 땅 = 지단地坛


분뇨차가 다니던 문이라고 하면 왠지 냄새가 솔솔 나는 듯하지만, 농사가 국가의 근간이던 옛날에는 땅을 풍요롭게 하는 거름이야 말로 귀중한 자원 중 하나였을 터. 매년 황제가 직접 땅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곳인 지단공원 (地坛公园/띠탄공위엔)이 근처에 위치해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이보다 찰떡일 수 없는 조합이다. 지단공원은 은행나무길로 유명한 곳이기도 해서 가을이면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하반신 불구가 된 사철생(史铁生) 작가의 자전적 소설 <나와 지단/我与地坛>이라는 소설에서 모티브를 따온, 붉은 벽이 상징적인 까페, 我与地坛THECORNER.

다양한 딤섬 요리와 24시간 오픈하는 거대한 5층 건물로 유명한 식당, 금정헌(金鼎轩/진딩쉰).

북경 최대 라마 사원이자 황실의 사찰, 옹정제가 거주했고 건륭제가 태어난 곳, 26m에 달하는 거대한 목재 불상이 위치한 옹화궁(雍和宫/용허공).

국립대학 국자감(国子监/궈즈지엔)과 공자를 모신 사당 공자묘(孔庙/공미아오).

젊은이들과 관광객들로 늘 붐비는 감각적인 바와 까페들의 집합소 우다오잉후통(五道营胡同/오도영)

등등... 지단공원을 둘러싼 이 지역 매력의 끝은 어디인가 싶다.

2016년 추석 무렵 방문했던 옹화궁과 금정헌부터, 2017년 1월 국자감 & 공자묘를 거쳐, 2021년 가을 은행나무 지단공원까지 이 지역에 듬뿍 남은 나의 추억들


화려한 볼거리 속 은근한 매력


동직문(东直门)과 안정문(安定门) 사이 지역은 볼거리, 먹거리의 천국이다. 누군가 나에게 이 근처를 가보고 싶다고 조언을 구한다면, 하루코스, 반나절코스, 관광코스, 역사코스, 산책코스, 수다코스. 맛집 코스 등 최소 10개 정도의 다양한 동선을 짜드릴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어떤 날에는 화려한 볼거리와 관광객들의 중심 지역을 살짝 벗어나서 망중한을 즐길 수 있는 나만의 조용한 공간에서 책과 커피를 함께 하고 싶은 흐린 아침도 있다.


화웬후통(花园胡同)

조용한 후통 골목에 '도시공간1921문화상업원(城市空间1921文化产业园)"이라는 현대식 구역이 나타난다. 갑자기 너무 다른 공간이 나타나 의아하지만 입점한 식당, 까페 등이 개성이 넘치면서도 후통과 잘 어울린다.

수제맥주&햄버거 Wild Kite, 낮엔 커피 DU@ 더블엉클까페 & 밤에는 와인바 Orange Hour, 타코 바 THE TACO BAR


이 중 나의 선택은 페이지 원(Page One) 서점. 나무들에 둘러싸여 2층 야외 테라스를 품은 회색 벽돌건물을 보자마자 당장 들어가고 싶어진다.

흐린 날에는 꽃 색깔이 더 선명해지는 마법이 있다. 창 밖 회색 기와를 바라보며 커피 마시고 책 읽기 좋은 곳에 내 자리를 잡았다.


화웬후통은 1921문화상업원 외에도 소박한 매력이 곳곳에 숨어있다. 쓰러질듯 거대한 나무를 보니 내 자신이 겸손해지게 만드는 이 골목의 긴 역사를 느낀다.


팡지아후통 (方家胡同)

사람들로 늘 붐비는 우다오잉후통과 국자감거리에서 한 골목만 아래로 내려오면 위치한 팡지아후통은 7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방씨네(方家) 골목이라고 그 유래를 유추할 수 있다. 끊임없이 지나가는 자전거와 전동차들로 인해 후통 걷기는 생각만큼 한적하지 않다. 뒤를 잘 보고 부딪히지 않도록 주의하면서도 여유를 느끼는 내공이 은근 필요하다.

남의 빨래를 몰래 찍어 죄송했지만 빨간 내복에 눈길이 가는걸 어떡해…


팡지아후통을 걷다보면 눈에 띄는 곳 중 하나가 바로 46호문화창의원구역 (46号文化创意园区)이다. 이곳은 원래 선반공장이 있던 곳으로 공장 철거 후 2008년부터 숙박, 소극장, 공연예술단체, 건출예술, 시각디자인, 바와 까페 등이 입주해 있다. 이곳 가게들은 주로 오후 늦게 오픈하기 때문에 아이들 하교에 맞춰 돌아가야하는 나에겐 그림의 떡일 뿐인데, 작년에 운 좋게 기회가 주어져서 "북평기기수제맥주 (北平机器 Peiping Machine)"를 무려 밤에 방문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온몸이 쿵쿵 울리는 비트의 음악 속에서 맥주 마셔본게 얼마만이던지?!

이런 젊은이들의 분위기가 그리우면서도 어색해진 나이...


팡지아후통 속 또 하나의 중요한 건물인 팡지아후통소학교 (方家胡同小学)도 쉽게 눈에  띈다. 원래 순군왕부(循郡王府)의 서부정원에 속했는데, 현재는 소학교로 사용 중이며 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유명한 문학가인 라오셔(老舍/노사) 선생이 이곳 소학교의 3대 교장을 역임한 바 있다. 왕부王府는 황실 가족들의 거주지로서 북경 2환 이내 자금성을 둘러싸고 있으며 현재에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학교 간판은 라오셔 선생의 부인의 친필이라고 한다.


공부의 기운, 국자감과 공묘 거리


팡지아후통을 빠져나와서 이 근처 가장 유명한 후통 중 하나인 국자감거리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겨본다. 다.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国子监/궈즈지엔) 그리고 유교의 최고봉 공자를 기리는 사당 공묘(孔庙/콩미아오)가 위치한 나무 울창한 거리는 일년 내내 인기가 많다.

흐린 하늘과 쌀쌀한 바람, 3월의 국자감 거리
눈부신 햇살과 나무들, 10월의 국자감거리


언제나 관광객들로 붐비는 지역이지만 도로 폭이 넓어서 걷기가 좋다. 이곳을 지나던 옛날 선비들과 관원들을 상상해보기 좋은 스팟이 있는데 바로 국자감 거리 양쪽에 위치한 하마비 (下马牌/샤마베이)이다. 말 그대로 '말에서 내리는 위치'를 뜻하는 비석이다. 공묘를 기준하여 동서 양쪽에 각각 10m씩 떨어진 장소에 4m 높이의 하마비가 있다. 이 비에는 한어, 만주어, 몽골어 등 6개의 언어로 “관원 등은 이 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리시오”라고 새겨져 있다. 이 곳부터 공묘의 영역이므로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 진정으로 예를 갖추라는 뚯이다. 나는 타고 온 말은 없지만 하마비 앞에서 살포시 예의바르게 그 옛날 이곳 분위기를 상상해보았다.

국자감과 공묘 입장하려는 사람들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 우다오잉후통


북경 생활 초기 시절, 후통에 관심이 막 생길 무렵에 중국어 과외 선생님이 우다오잉후통(五道营胡同)을 가보라고 추천해주셨다. 난뤄구샹 다음으로 처음 가본 후통이라서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와 추억이 깃든 곳이다. 너무 유명해지고 바와 까페들이 즐비해서 진정한 북경 거주지역의 느낌은 없지만, 이 또한 현재 후통의 다양한 변모 중 하나라고 여기고 그냥 즐기면 되는 것 같다.

라마 사원 옹화궁이 바로 앞이라서, 국자감거리와 우다오잉후통 근처에는 불교용품 상점이 많다.


우다오잉(五道营/오도영)은 과거에 무덕위영(武德卫营)이라 불렀으며, 명 성조 주체가 북경에 도읍을 건설한 후에 거리가 존재했다. 이곳은 명대 성을 지키는 병영 주둔지였다고 한다. 청대에 이르러서 깃발을 만들던 곳으로 오도영(五道营)이라 불리웠다.

후통 초입에 위치한 청동부조. 과거 이곳이 “무덕위영 武德卫营”이라 불리던 병영 주둔지였음을 기억하게 해준다.
버거집 He Burger, 브런치까페 闲Barblu, 판다맥주
메탈핸즈 까페는 이 거리에만 무려 3개!!
베트남식당 완菀wǎn, 태국식당 란蘭, 빠에야가 생각날 땐 스페인식당 사프론Saffron
KFC도 코스타커피도 고풍스럽게.
기타 수많은 감각적인 매장들과 까페, 식당 들. 걸으며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꽉 채워지는 우다오잉후통


700m 길이의 길지 않은 좁다란 후통에 까페와 바, 상점이 엄청 밀집해있다. 각 가게마다 날 좀 봐달라는듯 개성 넘치는 간판과 인테리어를 뽐내고 있고, 상점들 쇼윈도우에도 특이한 물건들의 많아서 그저 사진기만 들이대어도 재밌는 컷들을 많이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유난히 젊은 중국 아가씨들이 촬영에 아주 진심인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우다오잉후통 입구에는 규모로나 분위기로나 다른 가게들과 매우 차별화된 식당이 하나 있다. 친환경먹거리에 대한 찬사인 미슐랭 그린스타의 위엄을 자랑하는 경조윤(京兆尹/징자오인) 채식식당이 그것. 온갖 유명인들은 모두 다녀갔다고 하니 궁금증 폭발이라 북경을 떠나기 전에 한 번 와볼 수 있을까? 애초 한적한 후통에서 책과 커피나 즐기고 오자던 계획과는 달리 이렇게 핫플레이스까지 절로 긴 발걸음을 옮기게 된 안정문 근처 나들이는, 소문난 육식파인 내가 고급진 채식식당 앞에서 미련을 남기며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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