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4대 성당 중 서당, 신가구 악기거리, 국가도서관 등
나는 한 때 ‘절대병’에 걸렸었다. 늦게 찾아온 사춘기 탓인지, 아니면 A형 모범생 스타일이 지긋지긋해져서 인지 몰라도, ‘절대… 안 할거야’를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결혼 전에는 ‘절대 결혼 안 할거야’, 결혼 후에는 ‘절대 아이 안 낳을거야’, 큰 애 낳은 후에는 ‘절대 둘째 안 낳을거야’… 결국 둘째 낳고 난 이후에야 이 병이 부지불식간 사라진 것 같다. 그제서야 인생이 무엇인지 조금은 깨달은 모양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절대병’은 두려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아직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해서, 나는 궁금함과 호기심보다는 걱정이 앞섰던 학창시절을 보냈다. 이후 수년 간 두려움을 넘어선 인생의 선택을 하며 살아왔고 지금 이 순간 만족감을 느낀다. 미래를 미리 알 수 있었다면 누구도 쉽게 결혼과 출산을 꿈꾸지는 못할 터. 내 나이 또래들에게 고전과 전설로 추앙 받는 신일숙 작가의 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 나오는 대사인 “삶은 예측불허. 그러므로 생은 의미를 갖는다.”는 타국 생활을 시작하며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다가올 때마다 떠올리는 문구이다.
9개 내성 중에서 얼핏 봐도 볼거리가 거의 없고 검색해봐도 사람들이 그다지 잘 가지 않는 서직문 지역.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전혀 몰랐으며 몰라도 사는데 지장이 없지만, 직접 걸어보고 느끼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이방인의 발자취를 기록하는 것, 그리고 예측불허 풍경과 발견들이 북경 생활에 소소한 즐거움과 의미를 주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서직문(西直门/시즈먼)은 과거 내성의 9개 문 중 황제의 문인 정양문(正阳门) 다음으로 큰 문으로서 북경 내성과 외부를 잇는 서북단의 관문 역할을 했다. 황제가 사용하는 물을 운반하는 통로 역할로서, 천하제일이라고 하는 서부 지역 옥천산(玉泉山)의 물을 사용하였다. 매일 노새가 끄는 수레에 물통을 싣고 황제의 용포로 덮어서 한밤중에 서직문을 통과하여 성내로 들어와 황궁까지 운반했다. 1969년에 철거되고 지하철 2호선이 건설되었다.”
현재 서직문 근처는 교통의 요지이다. 중국 내 기차역들이 그렇듯이 왠만한 공항 크기의 북경북역(北京北站). 서직문 부근 대규모 북경동물원(北京动物园), 1957년 문을 연 중국 최초의 대형 천문관이자 당시 아시아 대륙 최초의 대형 천문관인 북경천문관(北京天文馆), 600년 된 은행나무가 금가루 뿌려놓은 듯 압도적인 가을날의 오탑사(五塔寺), 시민들에게 넓은 녹지를 제공하고 있는 자죽원공원(紫竹院公园), 그리고 아시아 최대 규모이자 열람실이 인상적인 중국국가도서관(中国国家图书馆) 등이 주변에 있다.
성문 이름 기준으로 하여 안쪽 방향 도로는 내대가(内大街/네이따지에), 바깥쪽으로 뻗어나간 도로는 외대가(外大街/와이따지에)라 불리는데, 옛 성문이 있던 지역의 도로 명칭은 대부분 이런 원칙을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서직문내대가(西直门内大街)를 따라서 옛 성문 안쪽을 상상하며 걸어들어가 보는 셈이 된다.
"서당(西堂/시탕)은 북경 4대 성당 중 막내로서 1723년에 시공하여 1912년에 재건하였다. 서당은 서직문성당(西直门天主堂) 또는 성모성의성당(圣母圣衣堂)으로도 불리며, 4대 성당 중에서 유일하게 예수회가 설립하지 않은 교당이다. 옹정제 원년에 드리거가 서직문 내의 토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건설하고 이 곳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딕건축 양식이며 3층 첨탑이 있다."
천주교 신자인 나로서는 의미가 있는 장소에 왔다. 북경에는 동서남북 성당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4대 성당이 있는데, 그 중 서당(西堂)이 이 곳이다. 2020년 초부터 전세계의 일상을 바꾸어 버린 코로나 사태이지만, 이 곳 중국에서 특히 아직도 일상을 회복하지 못한 몇 가지 중 하나가 바로 외국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종교활동이다. 2년 넘는 시간 동안 꾸준한 침묵이며, 한국인들이 주일 미사를 드리는 동교민항 성 미카엘 성당 역시 아직 묵묵부답이다.
일요일 오전 항상 미사 드리던 생활에서 벗어난지 2년이 훌쩍 지나버리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살았다. 잊혀짐이 빠른 아이들의 신앙생활도 점점 우려가 되고 있다. 한국과 생김새와 먹거리, 환경이 비슷한 중국, 게다가 한인타운 왕징에 살다보면 가끔 이 곳이 중국인지 잊을 때가 있는데, 이러한 통제를 느끼게 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아, 여기는 체제가 전혀 다른 나라이고 우린 이방인이구나.
그래서 코로나 기간 동안 남편과 북경 4대 성당을 밖에서나마 구경하고 온 적도 있다. 햇살이 뜨겁던 어느 여름 일요일 아침, 성당 밖에서 기웃거리며 발걸음을 돌렸었다.
그리고 봄 내음이 서서히 시작된 어느 날에도 밖에서만 사진 찍고 발걸음을 돌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참고) 북경 4대 성당
1. 동당(东堂) - 王府井教堂/성요셉성당. 1655년 청나라 순치제 때 건설, 1904년 재건. 왕푸징에 위치.
2. 서당(西堂) - 圣母圣衣堂/성모성의성당. 1723년에 시공하여 1912년에 재건
3. 북당(北堂) - 西什库教堂/시스쿠성당. 1703년 청나라 성조때 완공한 북경의 3번째 성당. 1900년 의화단사건 때 외국 선교사들이 폭동들과 대치한 장소
4. 남당(南堂) - 宣武门教堂/선무문성당. 1605년 마테오 리치가 명나라 신종에게 땅을 하사 받아 세운 북경 최초의 가톨릭 성당
서당에서 서직문내대가를 따라 안쪽으로 더 걷다보면 신가구(新街口/신지에코우) 지하철역이 나타난다. 이 곳에서 신가구남대가(新街口南大街)를 따라 아래로 조금 걷다보면 신가구악기거리(新街口乐器一条街)가 나타난다. 사방 모든 상점들이 악기로 가득찬 풍경이 펼쳐진다.
나는 어릴 때 피아노를 오래 배웠으나 등 떠밀려 해서 즐기지 못했기에 지금은 전혀 칠 줄 모른다. 큰 애는 피아노와 플룻을 가르쳤으나 사춘기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손에서 놓았고, 작은 애는 현재 우쿨렐레와 비올라를 즐기고 있다. 재능과 관심으로 따지자면 작은 애가 한 수 위인 듯한데, 이 녀석도 나중에는 어찌 변할지 미지수다.
쇼윈도 악기 구경만으로도 흥이 절로 나고 기분이 좋아지는 거리이다. 중국 전통악기부터 서양 악기들까지, 그리고 수리도 가능하다고 하니 실제 목적을 가지고 온다며 더욱 흥이 날 만하다.
서직문 사거리에서 서쪽으로 3.5km 떨어진 장소를 꼭 언급하고 싶다. 그보다 더 가까운 천문대나 오탑사 등의 볼거리도 많지만, 하나의 장면만으로도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이 장소가 나에겐 서직문 근처 볼거리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자죽원공원 동쪽 끝에 위치한 중국국가도서관 (中国国家图书馆/National Library of China)은 아시아 최대 규모의 도서관이다. 이곳에서는 과거와 현대를 망라하는 방대한 도서와 기록물을 보관 중이며, 중국 근현대 100년 사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도서관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다양한 추억을 소환한다. 내가 안경을 끼게 된 이유가 어릴 때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부모님의 걱정과 달리, 지금은 독서보다 스마트폰을 끼고 살기에 민망하긴 하지만, 아무튼 난 글로 된 것은 무엇이든 읽고 싶어하는 아이였던 것은 사실이다. 동네와 중고등학교의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읽던 시절을 지나서, 대학교에서 마주한 책으로 가득 찬 거대한 공간을 처음 본 충격과 놀라움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한 도시에서 박물관과 더불어 도서관의 지위와 인상이 나에게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꼭 한 번 중국국가도서관을 방문해보고 싶었다.
열람실에 들어선 순간 와우~! 조용하면서도 거대한 공간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지한 에너지에 내적 탄성이 터져 나온다. 이 하나의 광경이 주는 압도적인 느낌을 체험하려고 나처럼 일부러 방문하여 열람실 카드를 만드는 관광객들도 많다고하니, 직접 보고나서야 백 배 이해가 된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저자 올리버 색스가 암이 재발한 것을 알게 되고 죽기 전에 쓴 에세이 <나의 생애 My Own Life>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죽음을 마주하고서 언급하는 지각있는 삶이라니, 큰 울림과 진정성이 느껴진다. 학교 공부로서의 읽기와 배움을 넘어서, 그것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 아이들 삶의 여러 고비마다 힘이 되길, 그리고 읽기와 배움이 주는 기쁨과 용기를 믿어주길 바란다. 오래 전 학교를 떠나 굳어진 머리가 되어서야 겨우 깨닫는 엄마로서의 조언이자 아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