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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경 Dec 06. 2022

장녀, 부모의 기대를 무너뜨리다①

실수투성이 첫째,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다

부전녀전(父傳女傳)의 기적은 없었다. 조합이 문제였나? 자식이 셋이나 되는데 어느 하나 도드라진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종갓집 장녀부터 슬슬 꼬이기 시작한다.


종갓집 장남인 아빠는 면 출신의 이른바 '개천용'이다. 똑똑한 머리로 모든 식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도시로 유학까지 했던 첫째 아들. 이 때문일까. 내가 3살 시절 콩나물 머리만 그렸을 뿐인데 엄마는 그 길로 피아노 학원으로 달려갔단다. 오선지도 모르는 아기가 음표를 그리는 천재로 보였다고 한다. 참으로 웃지 못할 에피소드다. 


하지만 아빠는 일찌감치 싹(?)을 알아보았다. 딸의 생애 첫 성적표를 받아 든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한 마디 툭 던졌다. '이게 점수니?'. 크게 나무란 것도 아니었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지만 마디가 가슴 깊이 박혔다. 누군가에겐 천재로, 누군가에겐 바보로 보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부모님께 사랑받는 딸이 되고 싶어 닥치는 대로 배웠다. 무엇 하나라도 잘하는 것을 찾아야만 했다. 피아노, 플루트, 미술, 조각, 에어로빅까지 지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았다. 


반응은 피아노 학원에서 왔다. 공교롭게도 어머니의 어릴 적 꿈이 피아니스트였고, 마침 진도를 쑥쑥 빼며 곧잘 치는 듯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학교나 학원에서 소위 '재능러'로 평가받곤 했고, 나 역시 그런 시선을 즐겼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대회에선 매번 미끄러졌다. 타고난 새가슴인 건지 재능이 없었던 건지동네에서 제법 친다는 소릴 듣던 아이가 넓은 무대에 올라서기만 하면 스스로 조연이 되었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사랑받는 유일한 무기는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라. 


일찍 특기를 찾은 딸을 보며 흐뭇해하는 부모님의 애정 어린 시선 아래 결국 예술고 입시까지 치르게 됐다. 이미 모친의 전폭적인 지원이 쏟아졌던 만큼 내가 먼저 백기를 들 수는 없었다. 포기라는 말은 공포와 다름 없었기에, 또 다른 꿈을 찾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절망감도 한몫했다.


예고 입학은 실패했다. 당혹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됐다. 천부적인 재능을 칭찬하던 작은 선생님도, 이 정도면 합격이라며 확언한 교수님에게서도, 우리 부모님에게서도. 나는 결국 그 길로 도망쳤다. 10년 넘게 쳐왔던 피아노를 그날 버렸다.


진짜 문제는 내가 모두의 기대를 끝장냈다는 것이었다. 첫째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괴롭고 힘든 일이다. 내게 제대로 말을 걸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싹이 보여 투자를 올인했는데 그 상실감이 오죽하랴. 하지만 어린 내게는 참 가혹했다. 무력하게 가만히 누워 당장 할 일을 찾아야 했다. 무엇이 됐든 시작해야 했다. 


그 시간 동안 신기하게도 눈에 보이지 않던 집안의 서열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이든지 내 위주였던 생활 패턴이 둘째로 넘어갔다. 이른바 '기대주'였던 첫째의 특권이 사라진 것이다. 말의 힘을 잃었고, 신뢰도 잃었다. 자신감 넘치는 행동들은 한낱 치기로 치부됐다. 애정 어린 말투, 눈빛, 관심을 한순간에 모두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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