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ADHD 환자의 현실, 그리고 해방감
"상사가 업무 지시를 했는데 글쎄 제가 10분 동안 드래그만 하고 있었더라고요. 그 사이에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거죠.
샤워를 할 때면 머리를 감았는지 기억이 안 나요. 실수는 그냥 일상이고요."
"나도 그래. 다들 그렇게 살지 않나?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봐. 그렇게 연차가 쌓이면 자연스럽게 실수가 줄더라.
실수투성이 인생이다. 온갖 종류의 물건들을 쉽게 잃어버리고, 중요한 약속도 깜빡 잊어버리고 만다. 꿈마저 쉽게 포기하는 사고뭉치…. 최근에서야 성인 ADHD이라는 진단명이 익숙하지만 어릴 적엔 그저 철부지 망나니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병원 문턱을 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걱정이 있었는지 모른다. 내겐 인생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괴로운 일이 주변인들의 '야 그거 다 그런 거야'라는 말들로 묶여 정말 쓸데없는 고민, 건강 염령증 따위의 일로 치부됐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참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고 깨트렸다. 고작 4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씩씩하게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심부름을 가면 집에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새로 사귄 친구 집에서 저녁까지 얻어먹고 왔다. 결국 한밤중에 도착한 집 현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눈물, 콧물을 쏟은 후에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달고 살았지만 어디서 다쳤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가족들과 다과를 즐기다도 문득 들리는 옆집 소리가 너무 궁금해서 후다닥 뛰어가다가 아빠의 커피잔을 쏟기도 했다.
무언가 깨트리고, 부수고, 잃어버리는 것, 사소한 기억을 망각하거나 왜곡하는 일들, 몸을 다치거나 쉽게 무기력증에 빠지는 일들까지 모두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주의하면 되지 않느냐는 지적이 늘 뒤따랐지만 실수는 늘 반복됐고, 나는 스스로를 구제불능이라 여겼다.
삶이 의지대로 흘러가는 엄마에게 이런 딸이 얼마나 버거웠을까 싶다. 엄마는 유독 지저분하고 정리하지 못하는 나를 못마땅해했다. 다리를 떨거나, 사소한 일에도 흥분 게이지가 솟구치는 것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갑이나 휴대폰 등 귀중품을 밥먹듯이 잃어버리는 일엔 화를 내다 못해 진절머리를 쳤다. 식욕을 조절하지 못하고 살이 찌기라도 하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다이어트 약을 먹고 죽을 만큼 굶어 살을 빼자 그제야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는데, 약을 복용하고 살을 뺐다는 사실을 알고는 시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그저 '의지박약자'로 보였던 것이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다 의지가 부족한 탓이지"
ADHD 약을 처방받고 병원을 나서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한평생 듣던 부정적인 얘기들이 서러웠다기보다는 사실 나조차도 나를 너무 미워하고 비난했었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해서다. 매번 실수를 반복하고도 "이건 실수일 뿐"이라고 위로하고 스스로를 꽁꽁 무장했지만, 깊은 내면에선 패배자라는 낙인을 새기고 불신했던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ADHD래? 나는 너보다 더 심한데"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집중력이 흐려질 때가 있다. 충동적인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목표를 쉽게 포기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ADHD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나도 그래'라고 쉽게 말하면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살아'라고. 하지만 내가 대체 이 증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의 힘듦의 강도를 입증하고 설득하기 위해 수많은 사건사고들을 줄줄이 읊기라도 해야 하나? 앞으로도 나는 온전하게 이해받지 못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의 외로운 싸움이 누군가에겐 여전히 의지박약, 게으른 자의 변명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괜찮다. 스스로를 이유 없이 미워할 이유가 사라졌으니.
그리고 확신한다. 더 나아질 기회를 조금 늦게 찾았을 뿐,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이 남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