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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HSonG May 16. 2024

"글러브"의 발명

글러브라는 것의 등장. 그것은 투기종목의 발전 그 자체.

사람의 신체 부위 중 의외로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손" 입니다. 그걸 저는 태권도를 수련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같이 태권도를 수련했던 동료 중 한명이 뒤돌려차기 (회축) 연습을 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서 손으로 착지를 해버렸는데, 운동시간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통증을 호소하다 다음날 이 친구가 깁스를 하고 나타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손을 갑작스레 땅에 딛어도 손가락에 골절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던 것이었는데, 저도 겨루기나 동작 연습 도중 손을 많이 삔 편이라서 (골절은 모르겠습니다. 알음알음 실금 정도는 났을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아주 가끔 비오는 날이면 손이 시큰한 것을 보면...) 이 부분을 많이 체감합니다.


사람 손의 뼈 구조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cheme_human_hand_bones-en)


손은 이렇게 약한 부위 입니다. 손가락의 뼈는 의외로 가는 편이고, 그 주변을 힘줄과 근육, 진피와 표피가 감싸고 있는 구조이기 때문인데, 이게 고작 한쪽 에도 30개밖에 안됩니다. 그러다보니 대충 충격이 손에 오면 그것을 근육과 힘줄이 받아서 분산을 하는 원리지만, 근육과 힘줄을 넘어설 정도의 충격력이 손에 전달되면 뼈는 여지 없이 데미지를 바로 받아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충 헬멧을 머리에 쓰는 이유도, 두개골을 감싸고 있는 진피와 표피가 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피와 표피가 분산할 수 있는 충격을 넘어서면 두개골을 바로 골절이 되어버리고, 그 속에 바로 뇌와 신경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치명적이란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인류에게 있어 "손을 다친다는 것" 은 치명적인 활동력 손실로 이어졌습니다. 원시 시대에 손이나 발이 사냥 중에 부러지면 그냥 죽게 내버려둔 것도 이런 연유가 컸습니다. 그나마 실금 정도라서 그럭저럭 자연적으로 붙으면 다행이지만, 그때는 응급처치 도구가 없어서 똑바로 뼈가 붙는다는 보장도 없었으며, 그러면 바로 다리나 팔이 뒤틀리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차라리 그정도면 "다행" 이었습니다. 아예 복합골절로 부러질 경우 아예 오래전엔 "처치 불가능의 골절" 이었기 때문에 이때는 그냥 "절단" 을 해버리거나, 그냥 죽게 내버려 두는 게 더 "자비로웠을" 상황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상황이 "중세시대" 까지 이어집니다.더 큰 문제는 골절이 발생 할 때 오는 통증인데, 이게 심하면 정말 "쇼크"가 일어나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했습니다. 결국 이것을 줄이기 위해서 그나마 고대의 사람들, 즉 의술을 시행할 수 있는 사람들 (옛날엔 주술사 내지 드루이드같이 그나마 "약초"에 능통한 사람들이 이걸 했습니다.) 이 쓴 방법이 "마취 효과가 있는 약초나 독초를 쓰는 것" 과 "피를 멎게 하는 약초를 짓이겨 바르는 것" 딱 2개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양귀비, 즉 아편입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4 게임 내 다큐멘터리 영상 - 중세의 수술

그나마 중세 시대가 되면서 "수술" 이라는 것을 시도해보게 되는데, 문제는 이때 이것을 "이발사" 들이 했습니다. 그나마 이발사들이 사람의 몸에 칼을 댈 수 있는 자들이라서 그랬던 것일까요? 이 이발사들이 한 수술은 지금 와서는 "그냥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것 아닙니까?" 라는 말이 나올법 한데도 그래도 그냥 이렇게라도 했습니다. 차라리 상처가 곪아서 죽거나, 쇼크로 죽는 것보다는 정말 자르거나 째서 어떻게든 원인을 처치하고 바늘과 실로 봉합하는 것이 낫긴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 의족과 의수도 발명이 됩니다. 일단 잘랐으니까 대충 뒷 수습은 해야 하니까.... 라는 이유가 맞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손을 보호하는 것"은 중요했고, 그러다보니 나름 고대 사람들도 방법을 짜냈습니다. 제일 간단한 방법은 "손에 천을 둘둘 감싸는 것" 이었습니다. 일단 "충격을 최대한 손에 바로 안받게" 하면 된다는 발상이었고, 대충 식물의 줄기에서 뽑아낸 섬유로 인간이 "천을 만들 수 있게 된" 그 때부터 "장갑" 이라는 것도 같이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그런 부분에서 인류가 "목화"로 실을 만들게 된 것을 그 어떤 것보다 혁명적인 진일보라 보는 인류학자도 있습니다.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면"입니다. 물론 면보다는 삼베, 즉 "마"가 좀 더 오래 쓴 섬유는 맞지만, 마의 경우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즉 "통기성" 면에서는 마는 훌륭했지만, 충격 흡수의 용도로 쓰기엔 마는 너무 조직이 단단하고 거친 편이라서 손에 아무리 둘둘 싸매도 그렇게 큰 도움은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원전 4000년전 인도 대륙에서 발견된 "목화"에서는 "솜"이라고 하는 섬유질의 뭉치가 씨앗에 있었고, 이것을 계속 모아 뭉쳐 놓으면 굉장히 푹신하며, 이것을 실로 가공하고 천으로 만들어 몸에 싸매면 충격의 흡수도 그럭저럭 된다는 것을 안 인도와 중동의 사람들은 일찍이 기원전 3000년 즈음부터 이 천으로 옷을 만들고 장갑을 포함한 의복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목화의 씨앗은 중동을 넘어 그리스와 이집트 쪽으로 가면서 드디어 인류가 "솜"을 활용하는 때가 오니 이것이 기원전 2500년 정도 였습니다.


모로코 전통 무두질 장면 By Donar Reiskoffer, CC BY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458235


그리고 여기서 드디어 인류가 "동물을 사냥한 후" 그 가죽을 가공하는 기술이 나옵니다. 물론 "무두질" 자체가 이미 구석기 시대에 나온 것이긴 하지만, 이 가죽을 "인간이 쓸 수 있는" 재료로 만드는 제법이 정립이 잘 되어 있진 않았습니다. 겨우 이집트인들이 "탄닌" 을 써서 (나무 뿌리나 일부 나무 열매 등에 있는 탄닌을 잿물에 섞어서 하는 방법입니다.) 가죽을 무두질한다 정도만 알아냈을 뿐 이것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가, 기원전 1800년 경, 중동 히타이트인들이 "명반"(Alum) 이라는 것을 발견하면서 이 것을 기존 탄닌 제법에 섞어 쓰면 더 효율적이고 많은 가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면서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 지역이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이고, 그래서 튀르키예는 아직도 "우리가 가죽공예의 원조" 라고 내세웁니다. 그럴만도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면으로만 손을 감싸는것을 넘어 거기 위에 가죽 끈을 한번 더 둘둘 매어 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그리스와 로마시대 사람들이 하게 됩니다.


바로 "세스터스"가 나오기 시작한 때입니다.


원시적인 형태의 세스터스 상상도

"세스터스" 의 등장은 여러모로 혁명적이었습니다. 일단은 면 천에 가죽까지 쌓인 상태였기 때문에 충격을 보호하는 데에도 월등했지만 가죽이 쌓여있다는 것은 더 단단하고 두껍게 사람의 팔 위에 뭔가가 쌓여있는 상태였으므로 그냥 이것으로 사냥 중에 동물을 공격하면 맨손으로는 데미지를 주기 어려웠던 맹수들을 상대로 그럭저럭 "제압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사냥에만 쓰다가, 손을 많이 다칠 수 있는 작업들 (보통 대장간 작업들이 그랬습니다.) 에 쓰다가 이제 이걸 "올림피아 제전" 에도 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바로 "최초의 복싱" 이었습니다. 드디어 기원전 480년 경의 올림피아 제전에서 복싱 경기를 세스터스를 끼고 하게 되면서 드디어 "최초의 글러브"를 쓴 복싱 경기가 나왔고, 이건 또 손가락이 나와있는 형태 (오픈 핑거) 였으므로 바로 팡크라티온 경기에 쓰게 되면서 투기종목의 "필수 도구" 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자이크화로도 남겨졌습니다. 물론... "나체"로 경기하는 것은 그대로였지만요.


By Photo by Marshall Astor on Flickr, 2007-01-04, see https://www.flickr.com/photos/lifeontheedge/3

그리고 로마 시대, 콜로세움의 "검투사 경기" 가 나오면서 세스터스는 드디어 더 용도가 많아집니다. 올림피아 제전에서 쓰던 것을 넘어 로마 검투사들이 갑옷에 칼만 들고 맹수들을 상대하기엔 손을 다치는 경우가 많았는지, 검투사들이 세스터스를 차고 칼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의외로 한손 검술을 하기에 밸런스가 잘 잡히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검도를 하신 분들은 아대를 차는 이유를 더더욱 잘 아시긴 하지만, 이유를 다른 분들에게도 설명하면, 검 자체가 길고 무게가 있기 때문에 검을 잡고 있는 쪽에 아대로 무게를 더해주면, 칼 끝쪽에 몰아진 무게가 분산이 됩니다. 진검인 경우엔 이렇게 무게가 잡히고, 죽도나 목검 등의 격검대련의 경우 무게가 오히려 팔 쪽으로 몰리기 때문에 휘두르기 좋은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서 세스터스는 "복싱" 에도 "팡크라티온" 에도 "한손 검술"에도 쓰이게 되고, 로마의 문명이 점점 서쪽과 북쪽으로 퍼지면서 북쪽의 바이킹들도, 서쪽의 노르만-프랑크-고트족들에게도, 그리고 저 너머 브리튼 섬의 켈트족들도 세스터스를 쓰게 되죠. 드디어 "도끼"를 쓸 때도, "둔기"를 쓸 때도, 그리고 "양손 검"인 클레이모어나 투핸디드 소드에서도 세스터스를 쓰게 되었고, 드디어 이 세스터스 위에 "철갑"을 두르면서 글러브는 한번 더 업그레이드 됩니다.


"건틀릿" 이었습니다. 그리고 건틀릿은 다른 갑옷들과 함께 "철갑"의 구성요소가 됩니다.


By Konrad Seusenhofer, Innsbruck - Photograph by Sandstein, CC BY 3.0, https://commons.wikimedia.org


하지만 놀랍게도 그 이후 "글러브"가 역사속에서 잠시 사라진 시기가 나옵니다. 세스터스가 당시 고대인들이 봐도 "그럭저럭 완벽한" 아대의 형태라서 그랬을까요? 이미 고대와 중세 시기에 면장갑과 가죽장갑, 그리고 세스터스와 건틀릿이 나온 시점에서 여기서 더 큰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로마시기 기독교 공인 이후 올림피아 제전이 폐지된 후에도, 그리고 전쟁의 역사가 철갑에 건틀릿을 들고 싸우던 시기에서 드디어 총기가 등장하여 근접전을 하지 않게된 이후에도 동일했습니다. 어차피 총기를 쓸 땐 화승총의 강한 반동을 잡아줄 수 있을 정도의 가죽장갑만 끼고 있으면 그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드디어 이 "세스터스" 에서 한발자국 더 나가게 된 것은 17세기의 영국이었습니다. 드디어 시대는 "근대"의 시기가 되었고, 소위 "귀족"들과 "부르주아지"들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서 "결투" 라는 것을 하게 되는 때였습니다. 이게 단지 "검술 결투" 즉 펜싱이라면 그냥 가죽장갑이나 건틀릿을 쓰면 되었지만, "주먹 결투" 즉 맨손으로 하는 "베어너클" 파이팅이면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단순히 "맨손" 만으로 상대를 "죽이거나" 그나마 조금 양보해서 "먼저 피를 내면 이기는" 퍼스트블러드 방식으로 결투를 하는 것에 있어 "맨 손 만으로는 답이 안나오는"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원시적인 세스터스를 쓰기엔 손 위에 천을 감고, 가죽끈을 덧대로 매어 묶는 것은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렸죠. 

그렇다고 건틀릿을 끼자니 이것도 착용 방법은 번거롭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런던에서 귀족들을 상대로 권투를 가르쳤던 런던 권투 아카데미에서 "안전한 주먹 결투" 로 이른바 "스포츠 복싱" 그러니까, 원시적인 형태의 올림픽 복싱을 고안하면서 대충 맨손에 천 감거나, 가죽 두른 거로 하는 것에서 더 안전한 방법을 고안해야 했는데, 이때 런던 권투 아카데미를 후원하고 있던 "퀸스베리 후작" 존 숄토 더글라스 퀸스베리가 "그러면 솜을 넣은 장갑을 써서 하자!" 라고 하여 드디어 천을 두른 손 + 솜을 넣은 가죽 장갑의 형태가 나오게 됩니다. 효과는 괜찮았습니다. 물론 정말 상대를 "죽이고 싶은" 결투의 상황에서는 여전히 그냥 베어너클 상태로 주먹 결투는 진행되었지만, 죽이지 않는 결투의 상황에서는 솜을 넣은 가죽장갑이어도 일단 가죽 자체가 표면이 거칠기 때문에 결국 마찰로 인해 사람의 얼굴에 피가 나면 그대로 "경기는 종료" 되는 상황이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안전한 주먹 결투" 였던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글러브들 (위 - 복싱 글러브 / 아래 - MMA 글러브)


그리고 이 이후는 여러분이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아는 복싱 글러브는 결국 천연가죽/인조가죽 재질 밑에 완충재 (천연 솜일수도 있고, 플라스틱 폼 재질일 수도 있습니다.) 가 있고, 그 밑에 또 합성섬유 재질이 있는 (보통 폴리에스터를 많이 씁니다. 면보다 더 내구도가 질기고 땀이나 이런 것에 강하며, 피부에 닿아도 알레르기가 대체로 잘 발생하지 않는 재질이때문입니다.) 구조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 따로 붕대 (이것은 천연 면 재질을 쓰는 경우가 많지만 합성섬유 재질도 있습니다.)를 손에 감거나 따로의 아대를 고정하는 "핸드랩" 을 거치는 방식을 쓰죠. (그리고 MMA나 주짓수 등에서는 추가로 스포츠테이프를 또 손가락에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잡기 동작은 더더욱 손의 근육이나 힘줄을 많이, 무리하게 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후에 드디어 MMA 종목이 나오면서 "오픈 핑거 글러브"가 개발이 됩니다. 이것을 만든 것은 바로 브루스 리, 즉 이소룡입니다. 처음엔 권투 글러브를 썼다가, 이거로는 다양한 손동작 구사에 한계가 있다면서 권투글러브 끝단을 자르고 다시 꼬매서 손가락 구멍만 내어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전에도 일본의 가라테 도장 등에서도 검도의 호완 (아대 위에 쓰는 호구) 을 낀 채로 대련을 하는 등 대충 "손가락이 나온 형태의 글러브" 비스무리한 방식을 엉성하게 쓰던 방식에서 이소룡이 드디어 "체계적인" 방법으로 손가락까지 활용 가능한 투기종목용 글러브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하면 될 듯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1967년 스파링 때 주변 사람들에게 선보였고, 이후 영화 "용쟁호투" 에서 직접 보여주면서 대중화됩니다. (물론 댄 이노산토의 회고로는 이소룡은 이때 이 글러브의 이름을 딱히 지어놓지 않았다 합니다. 그냥 주변 사람들이 "켄포"(권법) 수련용으로 괜찮겠다 싶어서 대충 "켄포 글러브" 라고 불렀다고 하지요.)


영화 용쟁호투에서 처음 등장한 "켄포 글러브" 이때 같이 나오는 사람은 영화감독 홍금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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