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이이즘 VOL.1
안녕? 스물아홉 살의 H야! 난 서른여덟 살, 바로 너야. 9년 전 나에게 편지를 쓰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하다. 과연 이 편지가 너에게 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늦은 시간까지 야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방바닥에 누워 ‘이대로 바닥에 빨려 들어가면 좋겠다’고 상상하는 너에게 말이지. 특히 모든 것이 버겁고, 피곤하고 마음이 조급해졌던 그날. 그 날의 네가 이 편지를 읽었으면 해.
그 날은 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언제나처럼 지하철로 퇴근을 하던 너는 무심코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다가 한 할머니를 봤지. 남루하지만 구걸하기에는 멀끔한 옷차림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할머니. 그 앞에는 동전 몇 개가 흩어져 있었어. 너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어. 그 할머니가 첫 번째 구걸을 하게 된 날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거든. 구걸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수치심과 슬픔에 수천 번 망설이다 차가운 길바닥에 앉는 할머니의 모습 말이야. 어쩌면 열심히 노력했지만 다만 운이 나빴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게 된 걸 수도 있었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너무너무 슬퍼졌지. 그날 밤 너는 산다는 것이 너무너무 무서웠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한두 번의 실패로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막막함에 눈물이 났어. 옆에서 자고 있는 동생이 깨지 않게 울음을 삼키며,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대한 불운들을 지워내려 애썼지.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법은 없었어.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사는 것, 현재의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평균 이상을 해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지. 잦은 야근과 스트레스가 버거울 때도 많았지만, 매번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느라 전전긍긍했던 대학생 때보다는 낫다고, 월급을 받으며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자신을 다독이며 20대 후반을 보냈던 것 같아. 아, 오해하지는 마. 네가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니까. 더 잘하려고 애쓰고, 사람들과 잘 지내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왜 빛나지 않았겠어. 그냥 이제 돌이켜보니, 좀 안쓰러워서. 지금 네가 옆에 있다면 어깨라도 툭툭 토닥여줄 텐데...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해줄 수 있는 건 너의 30대가 최소한 “나 돌아갈래~”를 외치지 않을 만큼은 행복하다는 거야.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고? 알겠어. 연애와 결혼이 가장 궁금하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서른여덟 살의 너는 결혼을 했고, 아이도 있단다. 일은 하냐고? 그럼! 사실 난 20대보다 30대가 더 좋은 것 같아. 꽤 마음이 편안하거든. 너 상사에게, 동료에게, 가족에게 좋은 사람, 일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늘 긴장하고 애쓰며 지내잖아. 지금은 그런 것에서 많이 자유로워졌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늘고, 그러다 보니 남들 눈치도 덜 보게 되고.... 네가 열심히 노력해서 경력과 경험을 쌓아 준 덕분도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는 삶의 요령이 있더라고. 세월이 주는 선물 같은 거겠지. 덕분에 너의 휴짓조각 같던 팔랑귀도 상자 종이만큼은 두꺼워졌단다.
하지만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게 네가 지금 30대에 이루길 바라는 ‘안정적인 삶’을 의미하는 건 아니야. 생각해 봐. 결혼과 출산은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잖아. 특히 아이를 키우면서는 울기도 여러 번 울었지. 일도 마찬가지야. 30대 중반까지는 괜찮다 치더라도, 30대 후반이 되면 회사에서 위치가 애매해지기 시작해. 물론 경험이라는 것이 쌓여서 20대보다 일이 능숙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안정과는 거리가 멀어.
여기까지 읽고 심각해지는 네 얼굴이 상상이 간다. 걱정하지 마.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의 30대는 충분히 살아갈만해. 내가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그저 네가 지금보다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오는 미래를 맞이했으면 해서야. 혼란스러운 30대의 멘탈을 지키기 위해 터득한 요령 하나를 미리 알려주자면, ‘하나의 문이 닫히면 반드시 다른 문이 열린다’는 걸 믿으라는 거야. 알아, 이 말이 너에게 얼마나 이해 안 되는 말인지. 지금까지 네 삶의 방식은 ‘하나의 문이 닫히기 전에 다른 문을 열어 놓아라’였으니까. 그런데 30대가 되니 예상하지 못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인생의 구멍’이 꽤 여러 개 생기더라고. 예를 들면 직장을 잃거나, 몸이 크게 아프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하는 일 등 말이야. 이런 일이 생겼을 때는 괴로워하거나 미리 대비하지 못 한 자신을 탓하는 대신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곧 다른 문이 열리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백번 낫더라. 그리고 신기한 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새로운 문이 진짜 열린다는 거지.
음, 편지를 읽고 탐탁지 않아 할 네 표정이 그려진다. 30대도 순탄해 보이진 않고, 남은 40, 50대도 걱정되는데 120세까지 어떻게 사냐고? 사실 나도 노후가 걱정되긴 해. 스무 살 때는 서른 살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더니 지금은 40대가 코앞이고, 50, 60대도 멀지 않은 것 같거든. 그런데 그런 걱정은 그냥 30대의 나에게 맡겨줄래? 뭐, 약간의 노후 자금을 마련해두는 정도는 괜찮지만, 인생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말이야.
질풍노도의 30대도 잘 견뎌내고 있으니 40대도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주면 좋겠다. 60대의 내가 30대의 나를 본다면 ‘인생의 쓴맛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걱정은 그만. 이제 편히 자렴. 반가웠어, 스물아홉 살의 나야.
text 한38
illustration 정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