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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킴 Nov 28. 2019

덤 앤 더머 친구의 유럽 방문기

30년 지기 친구 가족의 벨기에 방문

벨기에의 마지막 늦가을을 지내던 어느 날,

고등학교 친구인 마노가 전화가 왔다.


"아내랑 6살짜리 아들이랑 너희 집에 놀러 가도 돼?

 2주 정도 지낼 수 있거든."


우울하고 차가워진 날씨로 지내다가 오래간만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물론 내 와이프는 옆에서 친구 가족이 온다는 소식에 당황한 표정을 짓고 손사래를 쳤다.

내가 반가운 긍정 표시를 하자, 그다음 마노의 부탁은 더욱 가관이었다.


"난 유럽을 가본 적이 없으니 네가 2주 일정을 대신 짜 줘. 신용카드와 비밀번호, 여권사본도 다 보내줄게."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을 하고 일단 전화를 끊었다. 요즘은 인터넷이 잘 되어 있어 항공권, 호텔, 렌터카 예약을 쉽게 할 수 있는데도 무작정 내게 전부 위임을 한 것이다.


당시 한가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계속 마노에게 수요조사를 해야 하고 예약  결과보고를 해줘야 하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고 잘못 예약하면 나에게 책임을 추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말 고민이 안 될 수 없었다.


마노는 나의 절친이다. 고등학교 때 등하교를 같이 했고, 대학생 때에는 당구 친구이자 찜질방 친구였다. 

우리는 너무 격 없이 바보같이 지내 당시 연애 중이던 지금의 내 아내가 '덤 앤 더머'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군대 들어가 운전병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그 후유증으로 목디스크가 심하게 왔다. 제대 후 신경이 누르는 악화된 컨디션으로 자신감이 줄어들고 모든 일에 힘들어했다.


결국 그는 디스크 수술을 해야만 했고 수술 후 국가유공자 및 장애 판정을 받게 된다.

그 이후로 좋아하던 술, 담배를 끊고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교회에서 만난 8살 연하의 여인과 느지막이 결혼하여 귀한 아들을 낳았다.


마노는 모든 결정에 우유부단한 편이었다.

따라서 여행 가고 싶은 나라를 정하는데 변덕을 부려 꽤 오래 걸렸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는 결정권이 없다며 아내의 수요를 무작정 거르지 않고 내게 통보했다.

그 때문에 난 거의 유럽 전체를 예약하다 취소하는 일을 매번  번복했다. 정말 내게는 피곤한 일이었다.

여행사 직원들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내와 아내끼리 직접 정하도록 일을 넘겨 버렸다.

 훨씬 효율적으로 진행되었으나, 들어갈 경비를 생각하지 않고 마노 아내는 희망지역을 나열했다.

생각보다 많이 나온  총 견적액을 제시하였더니 그다음 날 어이없는 메시지가 왔다.


'우리 가족, 하나님께 기도해보니 다음에 가야 할 것 같다며 전부 취소해야 할 것 같아. 돈이 너무 많이 드네. 미안하다.'


참 황당했다. 나랑 와이프랑 지금까지 뭘 하고 있는 건지...  화가 나기 시작했다.

결국 조정된 스케줄 제안으로 간신히 수긍하고 다시 오기로 수정했다. 마침내 그들은 참 어려운 과정을 거쳐 벨기에에 도착했다.

1주 차는 벨기에 근교와 아웃렛 매장을 다녔고,

2주 차는 베네치아, 로마에 이어 그리스 산토리니 코스를 마노 가족끼리만 가는 일정이었다.


특히 1주 차에 1박 2일 파리를 가는데, 렌터카를 갖고 내가 기사로 가게 되었다. 마노가 유일하게 숙박을 잡은 곳은 한인이 운영하는  저렴한 박이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마노가 직접 잡은 숙소였고 아침저녁 한식을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난 20여 년 만에 여인숙 체험을 하는 기분이 들어 불편했다. 공동 샤워장에 공동 화장실이고 계단이 비좁은 데다 5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다.

한편 세계 일주 여행하는 젊은 한국 친구들과 대화하는 계기가 되어 즐겁기도 했다.

어쨌든 파리 여행을 잘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두 부부는 나를 위해 찬송가를 틀어주었다. 진심으로 내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지만, 운전하면서 찬송가를 따라 부른 적은 처음이라 어색했다.



우리는 30년 전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덤 앤 더머의 어리숙함을 보여주며 마노 아내에게 우리의 변함없는 우정을 과시했다.

그의 가족이 오기 전에도, 온 후에도 다소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친구가 멀리서 방문해오니 즐거운 일이 훨씬 많았다.


내 아내는 내 친구 가족을 위해 예상치 않은 많은 희생을 했지만, 마노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정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나이가 어릴 때나, 중년이 된 후에도 마노와 나는 덤 앤 더머의 모습 그대로였다. 배꼽 잡는 순간들을 또다시 공유하는 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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